82년 전주 원동에 조성...11명 가족처럼 오순도순 "국가 유공자 기초생계비 정도는 지원해야"
‘생사고락’ ‘애국애족’
전주시 덕진구 원동 매암마을에 자리잡은 6·25참전 상이용사들의 집성촌인 전북무용촌(회장 고광용). 이 곳 사무실에 들어서면 첫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이 현판이다.
이 땅의 자유와 평화, 번영을 위해 구국의 일념으로 젊음을 바치고 숭고한 희생을 감수한 국가유공자들이 스스로 자립·자활기반을 구축하고 서로 돕고 의지하며 20여년째 오순도순 살아 온 보금자리다.
전북무용촌은 지난 1969년 전주 태평동 옛 전주공고 옆에 조성됐으나 81년 개설된 도로가 마을을 관통함에 따라 부득이 82년 3월 이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이주과정에서 당초 24세대였던 유공자 가족 가운데 21세대가 무용촌에 입주했다. 입주민은 6·25참전 상이군인 13세대, 상이전투경찰 4세대, 파월참전용사 4세대다.
입주자들은 실명 3명, 다리나 손 절단 5명, 관절절단 2명, 척추손상이나 고막파열 등으로 생계는 물론 혼자서 생활하기도 어려운 중상이자가 대부분이다.
전장에선 두려울게 없던 불굴의 용사였지만 오랜 투병생활과 세월의 흐름속에 하나 둘씩 세상으로 떠나 현재는 11명만이 생존해 있다.
이들 가운데 6·25참전 유공자는 고광용 회장과 이삼용·남상규·이병두·김록준씨 등 모두 5명만 남아있다.
고 회장(77)은 9사단 전차공격대대 소속으로 1·4후퇴 당시 대관령지구 전투중 양쪽 눈을 잃고 오른손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이삼용씨(80)는 국군과 북한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했다가 포탄 파편으로 양손을 모두 잃었으며 추후에 전공이 확인돼 화장무공훈장을 전수받았다.
충무무공훈장을 받은 남상규씨(78)는 강원도 금성지구 전투에서 양쪽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고 이병두씨(83)는 지리산 서남지구에서 공비토벌중 척추부상을 당해 등이 굽어가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이처럼 참전용사들이 중상이자로 생계가 어렵자 입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이주보상금 등을 투자, 익산에 화백물산과 익산하이테크 공장을 설립해 자립·자활기반을 마련했다. 광케이블과 통신선, 절연전선 등을 생산하는 화백물산은 그동안 한전과 한국통신에 납품해 이들의 생계유지에 큰 몫을 차지했으나 최근 수의계약 중단으로 4억여원의 손실이 발생하면서 공장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전투화와 방한화 등을 생산 납품하는 하이테크 공장만 겨우 가동, 유공자 가족들에게 월 20만원 정도만 지원해주고 있지만 생계에는 턱없이 미흡한 실정이다.
고광용 회장은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무수한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산화했거나 중상을 당해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고 있는데도 6·25를 마치 역사소설처럼 생각하는 세태가 정말 안타깝다”며 “우리의 뼈아픈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6·25같은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안보의식을 다시금 다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임동석 무용촌 사무장(66)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처우가 국민의 정부이후 사실상 동결된 상태”라며 “대한민국이 세계경제 10위를 자랑하지만 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는 만큼 도시근로자 기초생계비 정도는 지원해야 마땅하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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