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맛에 비유하자면 묵은 맛이 아닐까. 새 것, 최신식, 최첨단보다는 언제나 오래된 것, 구식인 것을 곁에 두게 된다. 오래될수록, 때가 묻어 있을수록 그 맛이 깊고 넓은 게 인생이라면 말이다. 물론 그것은 내 관념의 수사(修辭)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너무 빠르게, 신속한 즐거움만을 좇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은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만 같은 는 불안감을 준다.
빠르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추구해온 경제 성장의 가치를 요약하는 말일 것이다. 속력에 대한 가치부여는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부흥기엔 두말 할 나위 없이 중요한 모토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때문에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빠른 성장의 이면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수많은 부작용이 존재하고 있었다. 경제 성작의 목표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에겐 물질적인 가치가 우선시 되었다. 물질은 우리가 고래로부터 이어온 정신의 맥락들을 쉽게 교란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정신적 힘을 하루아침에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켰다. 물질이 정신을 앞서고, 정신은 물질을 치장하기 위한 장식품쯤으로 된 것이다. 그러면서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었던 근면 성실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은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이제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는 될 수 없다.
물론 시대의 성격이 완전히 변화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일정한 수준의 성장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물질적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먹고사는 일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쾌락과 즐거움이 중요한 삶의 목표로 등장하였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우리 사회 혹은 우리 가정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의 행복으로 축소된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을 너무 현재에만 국한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지금 여기의 행복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당연시하고 강요하는 것만큼 바람직하지 않다. 미래의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과 꿈, 어쩌면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유토피아라고 부를 때, 이러한 유토피아가 없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인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현재를 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삶의 내적 목표를 제대로 세우는 것이다. 허영과 과대망상, 혹은 그것과 달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찬가지의 감정인 자기혐오와 같은 생각들은 다 이러한 삶의 내적 목표 상실에서 기인한다. 내적 충일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도박에 빠지고, 로또복권과 같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루하루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은 재미없는 고루한 일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살면서 내적 목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며칠 전 광화문이나 시청 앞에 모인 젊은이들을 생각해 본다. 물론 그들이 부럽다. 그 젊음이, 나와 같은 노인에게는 사라진 그 배타적 청춘이 참으로 부럽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노파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모두 즐기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 부모 세대들이 일궈낸 성장의 열매를 따먹으면서 고통을 최소화하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물론 그것은 피상적인 생각인 만큼 오해일 수 있다. 다만 필자가 생각하는 것은 이 땅의 많은 젊은이는 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 자신을 개발하고 찾는 일에 월드컵 응원보다는 더 많은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때의 열정을 탕진하고 낭비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때로는 그것도 정신적 자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일상생활에서도 하루하루 매진할 수 있는 때에만 비로소 정말 열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가 해준 묵은지 지짐을 먹고 싶다. 별로 신기할 것도 새롭지도 않은 그 삭은 맛을 통해, 삶을 다시 돌아보리라.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잃었나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신홍수(재경 남원향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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