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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귀뚜라미 - 정병렬

달 속에서 귀뚜라미가 나와

 

밤마다 그리운 소식을 전해주고

 

돌아갑니다.

 

오동잎 속에서 귀뚜라미가 나와

 

뜨락 가득 가을을 뿌려주고

 

돌아갑니다.

 

흙 바탕에서 귀뚜라미가 나와

 

오솔길 가득 이슬을 뿌려주고

 

돌아갑니다.

 

아 어디에선가 귀뚜라미가 나와

 

내 가슴 속 등잔불 하나 켜 놓고

 

돌아갑니다.

 

시집 <등불 하나가 지나가네> 에서

 

 

영원히 나를 이끌고 갈 그 등잔불 하나

 

이 시는 얼핏 보아, 마치 어른이 어른을 위해 쓴 동시같은 인상이나 자세히 굽어보면 그 속에는 완곡하면서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넉넉한 철학이 담겨져 있다. 구조면에서도 완벽에 가깝다. 귀뚜라미가 ‘∼ 달 속에서’, ‘∼ 오동잎 속에서’, ‘∼ 흙바탕에서’ 나와 소식을, 가을을, 이슬을 뿌려주고 가는데 끝 연에선 ‘∼아 어디에선가’로 귀뚜라미의 출처가 없다.

 

이는 바로 ‘내 안에서’, 내 의식 속에서 창출된 귀뚜라미 이기 때문이다. 이 귀뚜라미라야만 ‘내 가슴속 등잔불 하나’는 켤수가 있다.

 

고로 앞의 1∼3연은 내 가슴속의 등잔불, 영원히 나를 이끌고 갈 그 등잔불 하나를 켜기 위해 차려진 위대한 밥상(?) 이었다 할 것이다.

 

/허소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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