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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홍상수 감독 '해변의 여인' - 썰물 같은 하룻밤 로맨스

“꼭 같이 자야만 애인이냐?”(창욱)

 

“일단 같이 자야지…. 우린 그냥 친구예요”(문숙)

 

“넌 친구랑 뽀뽀도 하냐?”(창욱)

 

“어유…, 진짜 치사하게…. 뽀뽀 한번 했네…”(문숙)

 

황사가 낀 서해안 바닷가. 세 남녀가 서 있다. 창욱(김태우)은 문숙(고현정)을 ‘애인’이라 생각하고 동행했지만 문숙은 그를 ‘친구’라 부른다. 문숙에게 흑심을 품은 또 한명의 남자 중래(김승우)는 이들의 옥신각신을 대단히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세 남녀. 머릿속 생각은 전혀 딴판이다. 재미있는 것은 숨기려 해도 스멀스멀 속내가 드러난다는 것. 하늘은 흐렸지만 보이지 않는 햇빛으로 인해 눈살을 시종 찌푸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생활의 발견’의 예지원처럼 선글라스를 끼지 않는 다음에야 표정을 어찌 숨길 수 있으랴.

 

이번에도 역시 하룻밤의 로맨스가 관건이다. 홍상수 감독은 ‘극장전’‘생활의 발견’등에서 ‘탐구’했던 일회성 로맨스에 또다시 도전했다. 즉흥적이고 우연한 만남이 알코올과 결합하면서 섹스로 연결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태도가 바뀐다. 둘 중 누군가는 말이다. 전작 ‘극장전’에서는 의외로 여자가 가차없이 돌아서지만, ‘해변의 여인들’은 다르다. 문숙과 선희(송선미)는 남자의 돌변에, 배신에 운다.

 

이렇듯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다 보니 무게중심 역시 ‘여인들’에게 쏠린다. 문숙과 선희를 오가며 재미를 보는 이는 중래지만, 영화를 끌어가는 것은 여인들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문숙의 변화가 드라마를 지배한다.

 

이 영화로 스크린 데뷔를 한 고현정은 그런 문숙을 참 쫀득쫀득하게 연기했다. 회 한 점에 소주 한 잔 걸칠 때의 맛처럼 그의 연기는 화면에 착착 달라붙는다. 자유분방한 연애관을 가졌으면서도 평소 선망의 대상이었던 영화감독 중래와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고 나자 소유욕에 휩싸이고, 그러다 결국은 스스로의 살풀이를 거쳐 정화된 모습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문숙의 모습은 시종 사랑스럽다. 그 중 한바탕 ‘연애질’이 썰물처럼 지나간 후 배어나온 상쾌한 표정은 백미. 고현정의 힘이다.

 

송선미 역시 꾸미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 담백하고 맑은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백치미를 띤 순진한 유부녀 선희 역시 회 먹을 때 꼭 필요한 고추냉이(와사비)처럼 톡 쏘는 맛이 좋다.

 

영화감독 중래는 “글이 안 써진다”며 후배 미술감독 창욱에게 서해안 여행을 가자고 조른다. 유부남 창욱은 “애인을 데려가도 되냐”며 싱어송라이터 문숙을 데리고 온다. 신두리 해변의 회와 술은 셋을 무장해제시키고, 눈이 맞은 문숙과 중래는 창욱의 눈을 피해 한 이불을 덮는다.

 

그러나 다음날 중래는 “머릿속이 클리어해지면 연락하겠다”며 문숙에게 선을 긋고, 이틀 후 다시 내려온 신두리에서 문숙과 비슷한 외양의 선희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다시 수작을 건다.

 

‘해변의 여인들’은 모두 기다렸다는 듯 중래에게 넘어온다. 중래는 여인들을 이름이 알려진 영화감독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말도 안되는 궤변으로 살살 녹이며 미칠 것 같은 순간적인 감정에 충실한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변명은 한다.

 

문숙에서 선희로 옮겨오기까지 이틀밖에 걸리지 않은 것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의 생김새가 닮았다”는 것. 문숙을 보고 싶던 차에 선희를 만나 사랑을 나눴다는 논리다.

 

그런 중래의 캐릭터는 기존 홍 감독 영화 속 남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비겁하고 치사하며 말이 많고, 순간의 쾌락을 향한 기대에 몸이 후끈 달아올라 인사불성이 된다는 점이다. 김승우는 그런 중래를 무리없이 소화하며 또 한명의 ‘홍상수 군단’ 단원의 탄생을 예고했다.

 

이렇듯 남자의 캐릭터는 변함없지만 영화는 그 점을 빼고는 상당부문 홍 감독의 변화를 읽게 했다. 여성에게 주체성을 부여한 것에 이어, 한동안 상승곡선을 그리던 유머는 다소 덜어내고 그 자리에 캐릭터 나름의 고민을 불어넣었다. 비록 그 고민마저 유머로 받아들일 소지가 있긴 해도 말이다.

 

여자의 과거 잠자리가 끊임없이 불쾌한 이미지로 떠오른다는 중래의 고민은 치사하지만 현실감이 있고, 의절한 아버지를 “산낙지 같아. (날) 뒤에서 꼭 잡고 쥐어짜는 것 같아”라며 눈물을 삼키는 문숙의 모습은 사랑 외에도 이들에게는 고민거리가 있다고 알려준다.

 

철 지난 해변에는 가족 단위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연애를 꿈꾸거나 가슴이 뻥 뚫린 성인들만이 온다. 그래서 뜨거운 여름보다도 어쩌면 더 화끈한 로맨스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들은 극중 버려진 진돗개가 결국은 다른 주인 품에 안기듯 로맨스의 배신 역시 스스로 치유해나갈 줄 안다.

 

홍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유머가 퇴색한 탓인지 ‘해변의 여인’은 좀 섭섭한 감이 있다. 남자가 아닌 남녀가 꿈꾸는 로맨스를 만나 반갑긴 하지만 지나치게 느린 발걸음과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다소 뜬금없는 눈물들이 시선을 분산시킨다. 전체적으로 예전 같은 화끈함(꼭 베드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과 영화적 재치가 반감됐다는 점도 아쉽다.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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