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에 쓸 배추와 파좀 사고 송편반죽을 만들기 위해 왔당게. 제사상에 올릴 생선은 며칠뒤에나 살것이여. 고창에 가서 장도 보지만 이곳 정읍 구시장도 자주 들르는디. 20살에 시집가고 나서부터 이용했응게 아마 십수년은 되었을 것이여”
고창 신림면 왕림에서 왔다는 전복순 할머니(63)는 송편 빗을 반죽이 기계에서 나오는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보름달같이 환한 얼굴로 웃는다. 남모를 것 같은 그 웃음속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서울과 인천,수원등지에서 흩어져 사는 아들과 딸, 손자와 며느리들이 추석에 내려오면 먹일 것이여” 전 할머니는 벌써부터 그리움으로 들떠있다.
추석을 일주일여 앞둔 지난 27일 오후 정읍 구시장(제1시장)내 ‘정읍떡방앗간’. 9평 남짓한 허름한 이곳에는 구석 구석 세월의 흔적이 베어 있다. 전 할머니를 비롯한 5명의 손님들이 얘기를 나누며 기다리는 좁은 떡방앗간은 고추가루와 송편가루, 참기름 냄새까지 뒤섞여 미묘하다. 기계소리까지도 한몫 가세한다.
어수선한 상태에서도 이집 안주인 안선자씨(49)는 송편가루와 반죽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남편 김씨(50)는 얘기를 좀 하자고 소매를 틀어잡자 배달가야 한다며 바쁘다 핑계대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 버렸다.
“ 아마 추석전날인 5일이 시루떡을 만드는등 제일 바쁠거예요. 요즘에는 하루평균 30∼40여명의 손님들이 고추와 쌀가루를 빻고 참기름을 짜기 위해 찾아와요” 안씨는 손님을 맞기 위해 매일 새벽6시 쯤이면 가게에 나온다면서도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생기가 넘쳐 보인다. 늦동이 아들 환진군(8) 때문이란다.
“ 요즘 떡방앗간을 찾는 사람들은 노인들이 대부분이에요. 30∼40대 여성은 별로 없어요. 먹을 것이 부족하던 옛날에는 떡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중년 안씨의 얼굴에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서 떡만들차례가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그때가 못내 그리운듯 아쉬움이 묻어난다.
“고추 1근을 빻는데 400원, 쌀한되를 빻는데 1000원, 참기름 1㎏를 짜는데 1500원,시루떡을 만드는데 7000원을 받아요” 안씨는 수고에 비해 보잘것 없는 돈이지만 남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만드는 것이 작지않은 보람인듯 보름달처럼 넉넉한 얼굴이다. “떡을 만드는 우리는 바빠서 정착 떡도 못해 먹어요”
‘정읍떡방앗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정읍냉동수산물센터’의 생선진열대.
제삿상에 올라갈 때깔좋은 조기와 홍어, 병치등 각종 생선이 손님을 기다리는 광경이 흥미롭다. 백열전구빛으로 치장한 생선들은 비늘을 번쩍거리며 추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맛을 벌써부터 돋우고 있다.
이곳 주인 임영철씨(46)와 부인 장씨(44)는 손님에게 팔 조기를 손질하느라 손길이 분주하다.
“ 옛날과 달리 고창과 부안사람들은 거의 안보이고 정읍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순창사람들도 적지않게 생선을 사러 옵니다” 직장 다니다 15년째 생선가게를 하고 있다는 임씨는 큰 벌이는 못되지만 욕심을 버리고 열심히 사니 마음이 편하다며 활짝 웃는다. 임씨는 지난해보다 경기가 안좋아 걱정이지만 자신은 마트에 생선을 납품하는등 그런대로 추석대목을 보고 있다고 귀뜸한다. 추석을 앞둔 2∼4일께는 손님들이 본격적으로 밀려들 것이라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
1910년대에 형성된 이곳 구시장은 십여년 전까지만해도 명절이면 인근 고창과 부안, 순창, 김제, 영광,장성등지에서까지 많은 사람이 몰려들만큼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이곳도 전국의 대다수 재래시장처럼 대형마트에 밀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화니 상품권발행이니 외쳐되지만 활성화는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도 구시장상권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500여 점포상인들은 올 추석만은 보름달처럼 넉넉하리라 믿으며 오늘도 애님(애인같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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