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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만난 작가] 김유석 시인이 만난 임영춘 소설가

"수탈의 들판 아픈 기억 아직도"...일 한국인 비하 반론서 큰 반향

임영춘 소설가는 자신의 제자이자 문단 후배인 김유석 시인의 인터뷰 요청에 반가움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달음에 김제를 찾았다. 봄 내음을 한껏 품은 ‘갯들’에서 두 작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이강민기자 ([email protected])

봄이다. 아슴히 펼친 들판, 얼어붙었던 듯한 지평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푸름이 낀다.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의 봄이 가장 먼저 들르는 곳 ‘징게맹경 외애밋들’, 딴엔 ‘갯들’이라 불려도 좋을 그 곳의 봄은 여전히 허기를 풍긴다. 작가이기 전에 한 포기의 민초로서 들판의 끈질긴 생명력을 생생히 지켜보았던 임영춘 선생을 따라 빼앗겼던 이 땅의 봄을 걸어본다.

 

“여그는 내 쌈터여. 뜬지 벌써 수 삼년 갔지만 맘은 늘 여그 백혀 있지. 인자는 몸이 이려서 맘 맨치로 자주 들를 수는 없지만서도…”

 

입을 열기 전에 망연히 들판을 둘러보는 선생의 눈시울이 애보리 빛으로 젖는다. 그의 생 가운데에서도 필경 고스란히 묻혀있는 유년의 기억을 어루는 것이리라.

 

“그 땐 너나없이 배곯이를 혔어. 입에 풀칠이나마 혀볼랍시고 여그저그서 농노들이 몰려 들었지. 쌀을 뺏어가려는 왜놈들 수작이야 뻔혔지만 당장은 굶어죽는 신세를 면혀는 게 더 급혀서 그놈들 종노릇을 마다 헐 수 없었당게.”

 

당시 무엇보다도 식량이 절실했던 일본은 간척지를 일구는 계획 하에 각지의 배고픈 조선인들을 끌어 모은다. 그런 이주민 중 한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이루 다 형언할 수조차 없는 민초들의 애환을 유년시절 내내 보고 겪는다. 훗날 그 아픈 기억들을 한 땀 한 땀 기워나가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자전적 소설 「갯들」이다. 그러므로 「갯들」에 그려진 극사실적인 줄거리는 소설이기 보다 우리 민족이 겪었던 삶 그 자체로 읽힌다.

 

 

-「갯들」이 나온 건 80년대 초로 알고 있습니다. 상당한 어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몇 몇 일화가 있었다는데 소개해주시죠.

 

“허허, 좋긴 뭘. 뭐, 별난 일은 없었고…, 조정래씨가 찾어온 거여. 조정래 알지?”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를 말함이다. 선생을 찾아 온 그는 책 한 권을 원했다고 한다.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어떤 연유에선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선생은 책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아리랑」이 세상에 나왔지만 선생은 읽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무대와 내용이 「갯들」의 확대판 같다는 말에 묵묵히 고갤 끄덕이는 선생은 「갯들」을 20권 분량의 대하소설로 개작할 요량이었다며 아쉬운 감회에 젖는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민족정서가 담긴 글을 쓰던 그의 삶이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 것은 1993년의 일이었다. 한국인을 비하하는 내용인 「추한 한국인」이라는 책이 일본에서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키자 그는 교사직을 주저 없이 던지고 그 책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의 책을 집필한다. 「추한 한국인이 일본에게 답한다」는 제목으로 포문을 연 그는 이후 일본 출판사가 엉뚱한 논리로 치장한 「추한 한국인-속편」을 펴내자 「추한 한국인인가, 추한 일본인인가」라는 반론서를 다시 쓰게 된다. 이어 양심적 일본인들의 목소리를 담은 「부끄러운 일본인」을 펴내어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진정으로 참회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첫 번째 비판서는 일본에서 번역·출간돼 아사히신문 등 일본의 언론들이 크게 다룰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켜 국내는 물론 일본에 까지 초청되기에 이르는데 그 와중에 갑자기 불행이 닥친다. 건강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다행히 죽음만은 면했으나 결국 지병이 되고 말았다.

 

“일제의 만행을 어찌 다 입에 담을 수 있것어. 골백번 사죄혀도 될까 말까 허지. 몸만 이러지 않았으먼 뭣이든 한껏 혀볼성 싶었는디…”

 

그는 “2차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본 천황의 진정한 사죄에 이어 위안부와 징용한국인 등에 대한 당연한 배상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도 최소한 독일만큼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10여 년 전 그러한 내용을 소설로 구상해 뒀는데 1급 장애판정을 받을 정도로 부자유스런 몸 탓에 마음만 앞세워 왔다는 그의 입가에 씁쓸함이 묻는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단 한 번의 통화에 기꺼이 성치 않은 노구를 이끌고 고향을 찾아준 그에게 실은 아무 것도 여쭐 수 없었다. 결코 픽션이 아닌 그의 글, 아니 그의 삶을 새기는 동안 오히려 그가 되묻는 듯 싶었다. 이 나라는 물론 그의 고향에서조차 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아리랑문학관’은 있어도 「갯들」은 없다. 오직 땅만이 알고 침묵할 뿐이다. 이제는 그 누가 나서 그의 정신과 의지를 잇대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몹시 부끄러웠다. 다시 그것만이 남아야 하는가.

 

살가운 눈길로 아지랑이처럼 아릿한 봄볕을 쓸어 담는 선생의 불편한 몸이 자꾸 눈에 밟혀오고 있었다.

 

 

김유석시인은

 

전북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김유석은 남성고와 전북대를 다녔다. 「상처에 대하여」란 시집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벽골제 근처에서 농사 지으며 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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