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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만난 작가] 시인 경종호가 만난 시인 박형진

질박한 전원생활 옮겨내 삶은 그대로 시가되고

농부시인 박형진, 그의 시에는 절박한 전원생활과 농촌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있다. ([email protected])

봄 햇살이 제법 영글었다. 햇살도 바닷바람이 들면 짠맛이 나는 것일까? 모항의 햇살에서는 짠내가 난다. 그 햇살에 박형진 시인이 박혀 있다.

 

시인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시커먼 빛을 돋아내던 간장이다. 시꺼먼 간장? 까만 것보다도 더 까매서 시커먼, 바로 묵은 간장이다. 묵은 간장에서는 짠맛보다는 단맛이 났다. 시인에게도 그런 오래된 간장 같은 단맛이 있다.

 

10여년 전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받았던 선물도 바로 그 묵은 간장이다. 20여년 유기농을 하는 시인이 직접 담근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을 생각하매 묵은 간장이 떠오른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것이다.

 

토요일 오후, 내변산 아래에 있는 시인의 집을 찾았다. 시인의 집엔 먼저 온 손님이 있었고 마루엔 빈 소주병 두개가 나란히 있었다. 더덕 넝쿨과 고추장, 지총나물이 있었다. 두 안주의 어울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산속의 더덕 넝쿨과 해변의 바위에 붙어 자라는 수초, 지총인 것이다. 아마도 시인이 살고 있는 이곳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안주인 것만 같았다.

 

시인의 주소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141-1 모항큰골이다. 부안읍에서 곰소까지 20여분을 넉넉히 버리고 나서도 다시 바다를 옆자리에 앉혀 20여분을 해풍에 맡겨야 닿는 곳이다. 죽염이 나는 개암사, 소금과 젓갈에 이름값이 더해졌던 곰소, 1500여년 고찰 내소사가 징검다리처럼 그 길에 놓여 있다. 이미 잘 알려진 기행서인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도 우리나라 최고의 고장으로 말해지던 그 부안의 한쪽이기도 하다.

 

시인의 집은 그런 산 밑에 밭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농부는 밭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흙벽돌을 찍어 5년 동안 직접 지은 밭 언저리 집이다.

 

시인에게 뒤의 산과 앞의 바다와 지금 서있는 흙 중에서 가장 닮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시인은 공자의 말을 꺼냈다. 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진 사람이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 물과 산 모두 좋지만 그래도 흙을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 가족이 함께 흘릴 수 있는 땀을 준 흙을 닮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우문현답이다.

 

 

삶을 시에 옮겨놓을 뿐이다

 

시인의 삶은 바로 시가 된다. 농부의 삶이, 아버지의 삶이, 남편의 삶이 모두 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시를 쓴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삶을 시에 옮겨놓을 뿐이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인의 시는 모항에 대한, 모항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아니 우리 농촌의 이야기가 앉을 자리만 바뀌었을 뿐이다. 또한 그 방법이 절묘하다. 첫 번째 산문집 「호박국에 밥 말아 먹고 바다에 나가 별을 헤던」을 고쳐 다듬고 새 글을 보탠 「변산 바다 쭈꾸미 통신」을 보면 시인이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 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정감나면서도 날카로운 면까지 있는 그의 글은 변산공동체학교 농사꾼 철학자 윤구병의 뽑아 올리는 글을 보면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박형진이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석죽은 대목이 있으니 바로 이 자의 글솜씨다. 글솜씨가 익혀서 얻을 수 있는 장시간 제도교육의 산물이라면 내 가방끈이 지 가방끈보다 몇 곱절은 더 기니 이것도 내가 윗길이어야겠지. 하지만 내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박형진의 그 능청스러운 말맛을 도무지 흉내낼 수가 없다. 오죽하면 내가 ‘글솜씨는 제도교육에 반비례한다.’라는 ‘윤규병의 잔머리법칙’을 발견해 냈겠는가.

 

전에도 한창 농번기에 책 한 권 디밀어서 내 하루 일품을 꼬박 날려 보내게 한 전과가 있는 박형진이 이번에도 ‘발문’을 써 달라고 왔다. 내가 물었다.

 

너 먹 갈아왔냐? 먹은 웬 먹이요. 붓글씨로 쓸라요? 아니 발바닥에 먹 듬뿍 묻혀서 한지에 꾹 누르면 그게 발문(발무늬) 아니것냐? 농사일도 바뻐 죽겠는데, 나 못쓰겠다. 아따 놓고 갈틴게 알아서 허쑈.

 

두 사람의 그 장면을 상상하자니 웃음부터 털털거리기 시작한다. 해학적이기도 하다. 발문은 뽑아 올린 글이고 본문과 닮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의 글은 그런 맛이 담겨 있다. 더하여 누구나의 고향 맛이 담겨 있다. 각기 다른 고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통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고향’은 달라도 ‘고향’이라는 말에 눈물을 글썽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지금 네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다. 농촌이다. 농촌을 바꾸어야 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 시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한 학기정도 밖에 다니지 않았다. 이 즈음에서 그의 이력이 궁금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호기심이라는 쾌락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이력을 간추리면 이렇다.

 

시인은 변산중학교를 1학기 마치고 가출한다. 없는 살림에 빚까지 낸 학비가 못마땅했다. 그리고 형님이 있는 서울에서 한 달 정도(따지고 보면 며칠이다. 거의 한달 내내 학교를 빠지고 서울의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으므로) 중학교에 다닌다. 그것이 학력의 끝이다. 학교 공부가 무의미하게 느껴진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다시 형님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일을 돕는다.

 

그러다 다시 공부에 관심을 가진 것은 18살 즈음이었다.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시인은 상경을 하여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어느 새 고물상이 되어있고, 박정희 정권 말기 시국 강연장이나 데모대의 중간쯤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곳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누님으로부터 ‘지금 네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다. 농촌이다. 농촌을 바꾸어야 한다.’ 라는 말을 듣는다. 그때 시인은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그 후 시인은 수원의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농민교육, 농촌문제에 대한 강의를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채 1년이 되지 못한 서울 생활이었고, 이것이 고향을 떠나 살던 이력의 전부가 된다. 그 후 시인은 고향에서 유치원 교사인 아내와 결혼을 하여 푸짐(큰딸), 꽃님(둘째딸), 아루(셋째딸), 막내 보리를 얻는다. 그리고 지금 푸짐이와 꽃님이는 막내의 이름이 같은 보리 출판사에 몸을 담고 있다.

 

시인은 고향으로 돌아와 카톨릭농민회와 함께 농민운동을 시작한다. 그 후 전국농민총연맹(이하 전농)이 결성되자 전농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문학의 힘을 제어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서당을 들였던 집은 야학이 들어섰고 그곳에서 접했던 문학전집, 그리고 서울에서의 채 1년이 못되는 동안 신동엽의 ‘금강’을 열 번 이상 필사를 하기도 했던 것도 바로 그 문학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 열정에 불이 붙은 것은 1992년 전농 부안지부의 사무국장을 그만두던 그 해부터였다. 그는 투쟁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농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를 쓰는 것보다 농촌의 삶과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겨놓기 시작한다. 남은 사람이 떠난 사람의 몫까지 챙기며 고향을 지키고, 때로는 사람이 없으면 없는 사람의 이야기로 지키기도 한다. 그것을 시라는 울퉁불퉁한 그릇에 담는다. 그러면 울퉁불퉁한 삶들이 제자리를 찾듯 담긴다. 그의 시는 그런 시이다.

 

 

영환이형,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가/올 가을도 이렇게 나락이 잘 여물었는디/…/닷 마지기 뒷논에 모 심거 놓고/잘 있어라 한마디로 떠나가더니/그 나락 익어서 두 번을 비어도/술 한 잔 먹고 해라 말할 사람 없네. (‘다시 나락을 베면서’ 부분)

 

시인은 언제나 시를 쓴다고 말하지 않는다. 삶을 글이라는 형태로 빌려 옮겨 놓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랬다. 산문집 「변산 바다 쭈꾸미 통신」이, 시집 「바구니 속 감자 싹은 시들어가고」가 그랬다. 다음 시를 보면 또한 시인의 삶이 어떠한지 더 이상은 말할 필요도 없을 듯 하다.

 

바람 잔 날/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한 방울/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추녀 물을 새어본다

 

한 방울/또 한 방울/천 원짜리 한 장 없이/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봄이 잦아들었다. (‘입춘단장’)

 

가난을 노래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엄살을 부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가난도 추위도 봄 눈 녹듯 녹았고 겨울이 그리 시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 보다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이,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특히 산문집 「변산 바다 쭈꾸미 통신」은 음식 맛으로 치자면 별미중의 별미가 아닐까 한다. 시인 박형진을 알고자 하면 시집은 당연하겠거니와 이 산문집이야말로 제격이 아닐까 한다.

 

「변산 바다 쭈꾸미 통신」(소나무, 2005)에서 편집자는 그의 글맛을 이렇게 표현한다.

 

“찰지기로는 인절미 같고, 허물없기로는 쑥개떡 같고, 맛나기로는 짭쪼롬한 보래새우 젓갈 같은 박형진의 글맛이 어디서 온 것인가는 그 살아 온 품새를 보면 알아 볼만하다”

 

고향이 있는 사람은 다시 그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기 위하여,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은 고향을 찾기 위하여, 그리고 어린 시절을 도시에서 보내버린, 그래서 고향이라는 말이 너무나 낯선 언어가 되어 버린 사람은 고향이라는 말이 주는 그 정감을 대신하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시인은 천둥소리와 함께 지낸다. 부안 변산의 풍물패다. 핵 폐기 처리장 때도, 새만금 문제 때도 그 안에 상쇠로 있었다.

 

웃음 지으며 ‘혹 부안에 가거든, 그곳에서 풍물소리가 들리거든 그것이 바로 천둥소리다.’ 라고 쓴다고 하자, 시인이 웃음 짓는 말을 한다. ‘어디서든 천둥소리가 나거든 그것이 부안의 풍물소리인줄 알아라.’ 하고 쓰라는 것이다. 그렇다. 부안은 그 소리로 핵 폐기장을 돌려세운 곳이기도 한 것이다. 천둥소리보다 더 무서운 천둥소리였던 것이다.

 

 

시인은 사랑을 위해서 풀잎이 된다.

 

그런 시인이 이런 사랑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사랑을 소개한다.

 

사랑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나는/모든 살아 있음의 제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바람 속/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오늘 알았다.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 (창작과 비평사) 中에서

 

 

박형진시인은

 

시인 박형진은 1994년 「창작과 비평」에 시 ‘봄편지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해 첫 시집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창작과 비평), 그 후 7년의 시차를 두고 두 번 째 시집 「다시 들판에 서서」(2001 당그레)를 내 놓는다. 산문집으로는 「호박국에 밥 말아 먹고 바다에 나가 별을 헤던」(1996 내일을 여는 책), 「모항 사람 술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2003 디새집), 「변산 바다 쭈꾸미 통신」(2005 소나무)가 있다. 지금은 전북 부안의 모항에서 농사 짓고, 시 짓고, 글 짓는 것으로 하루 몫의 해와 달에 감사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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