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인 만복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남원지방의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불교문화에 대한 학술자료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는 처음부터 7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계획한 것이 아니고 조사가 끝나고 난 다음 미진한 지역에 대한 조사를 계획하여 그 다음해에 조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조사기간이나 조사대상 지역이 임시방편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지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장기간에 걸치는 조사였고 몇몇 지역을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사하지 못하였지만 만복사지의 경역으로 추정되는 거의 전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의하면 고려 문종때에 창건된 만복사에는 동쪽에 5층 건물이 있고 서쪽에는 2층 건물이 있다고 한다. 또 서쪽에 있는 2층 건물내에는 35척의 동불이 있었다고 한다. 이같은 기록에 의하여 동쪽에는 5층 목탑이 자리하고 서쪽에는 2층 대웅전, 보다 정확히 말하면 금당, 또는 법당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만복사 저포기에는 만복사가 퇴락한 것으로 서술되어 세조이전 어느 시기, 대체로 고려말을 전후하여 왜구의 침략 등에 의하여 가람이 세를 잃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차년도 발굴조사는 기록에 있는 2층 법당으로 추정되는 지역, 즉 6각 대좌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고 2차년도 조사는 5층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7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는 기록되어있는 동탑 서전 양식의 고려에 형성된 창건 가람과 만복사저포기를 지은 김시습이 활동하던 조선 세조년간을 전후한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1탑 3금당식 중창 가람이 확인되었다. 1탑 3금당식 가람이란 고구려의 대표적인 가람 형태로 탑을 중심으로 동, 서쪽, 그리고 북쪽에 각각 법당을 배치하는 형태로 조선 세조때 가람을 중창하면서 왜 창건 가람 형태가 아니라 1탑 3금당식으로 중창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 발굴조사에서는 현재 만복사지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5층 석탑보다 앞서는 고려시대 전기로 추정되는 석탑부재들이 확인되어 창건가람에는 목탑외에 석탑도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만복사지는 발굴조사가 끝나고 난 다음 당시로서는 예외적이라 할 만큼 바로 정비가 이루어져 사적 공원으로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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