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제자들한테는 허실 말씀 없으셔요?”
“제자들한테? 미안해. 명창 국창 못 만들어놓고 죽으니, 즈그들이 복습 많이 해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지 말고 복습 많이 해서 남원에 동편제가 떨어지지 말아야돼. 남원 춘향골 판소리가 다른 데 보다 세서 판소리만 잘 해놓으면 남원을 지켜나갈 수 있어. 배워서 객지 가지 말고 남원을 지켜나가야 돼.”
목으로 우겨대는, 정통 동편제 소리만을 고집하던 강도근 명창. 단단하고 거친 철성으로 전력을 다해 소리를 하던 그의 유언이 공개됐다. 오랜만에 듣는 명창의 목소리에는 서울로 옮겨 활동하라는 수많은 권유들을 한 귀로 흘려보내던 그의 고향 사랑, 소리 사랑, 제자 사랑이 담겨있었다.
16일 국립민속국악원에서 열린 판소리 집중기획 ‘광대이야기’ 작고명창 회고전 ‘피안으로 간 소리’. 강도근 명창을 그리는 이날 회고전에는 제자 전인삼 전남대 교수와 이난초 남원시립국악단 예술감독, 민속국악원 창극부 단원 최영란 김수영 양은주 허은선씨가 함께 했다.
“열여덟살때 선생님을 처음 뵈러 갔는데 첫 마디가 ‘너희집 농사가 몇 마지기냐’고 물으셨어요. 그 뜻을 깨우치는 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선생님은 ‘네가 농사지어 근근히 먹고 살고 소리는 절대 팔지 말라’고 하셨죠.”
전교수는 소리를 하는 데 있어 남원 땅에서 태어나 강도근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생님은 제자들이 대회에 나갈 때면 여비없다고 차비도 주시고 고기도 사주셨다”며, ‘소리 가르치는 데 뭔 돈을 그렇게 많이 받느냐? 한번 가르치는 데 1만원씩만 받아라’라고 하시던 명창의 가르침을 전했다.
“미남은 아니시고 차돌처럼 야무지게 생기셨죠. 공부를 가르치시는 데도 엄격해서 ‘빌어먹을 것이 그것을 못해?’라며 눈물을 쏙 빼놓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일곱살 애기가 소리를 해도 칭찬을 해주라는 말씀을 꼭 덧붙이셨죠.”
남원에 ‘강도근동편제판소리보존회’를 만든 이감독은 “선생님의 소리를 전하기 위해 완창발표회를 많이 가졌다”며 “스승의 함자만 들어도 여전히 가슴이 설레이고 미어진다”고 말했다.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문화재 전문위원이 사설의 틀린 부분을 고치라고 하자, ‘문화재가 안되었으면 안되었지, 한 자 한 획도 절대 고칠 수 없다’고 버티었던 강도근 명창. 공단으로 만든 푸른색 도포만을 사시사철 입고 다니며 공연을 하던 그의 고집은 오명창 시대의 전통 동편제 소리를 제자들에게 물려주게 했다.
이날 회고전에서 전교수는 ‘흥부가’ 중 ‘제비노정기’를, 이감독은 ‘수궁가’ 중 ‘제비노정기’를, 초등학교 시설 강도근 명창을 처음 만난 민속국악원 단원들은 스승이 세상을 떠나기 전 육성으로 남긴 소리 ‘나는 간다’를 불렀다. 눈물 삼킨 소리가 피안으로 전해졌을까. 제자들의 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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