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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후 2년간 13번 테러당한 몽양 재평가

백범 김구가 민족주의 계열에서 분단에 반대했다면 공산주의 계열에서 좌우합작을 주창한 대표적인 인물은 몽양 여운형(1886-1947)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고 공산주의 진영에 몸을 담았지만 민족화합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좌ㆍ우 양 진영은 모두 몽양의 복잡한 행보를 꼬투리 잡아 그를 기회주의자로 매도했다.

 

광복 직후 정치세력 간의 힘겨루기는 수많은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당시 한국 사회의 혼란은 오늘날 이라크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좌ㆍ우 양쪽 모두에게 미운 털이 박힌 몽양은 테러의 표적이 됐고 결국 1947년 7월19일 극우파 한지근에 의해 살해됐다.

 

조영건 경남대 명예교수는 몽양 서거 60주기를 맞아 19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몽양 여운형과 평화통일' 학술대회에서 거듭되는 테러에 굴하지 않은 몽양의 삶을 정리하고 남북관계가 진전된 오늘의 관점에서 몽양의 삶을 재평가할 예정이다.

 

조 교수는 미리 공개된 발표문 '몽양과 6ㆍ15시대'에서 광복 후 2년 동안 몽양은 모두 13번의 테러를 당했다고 분석했다. 남한 내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한 박헌영 측의 소행도 있었고 극우파가 자행한 테러도 있었다.

 

첫 번째 테러는 광복 후 3일만에 일어났다. 몽양은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머리를 난타당했다.

 

몽양이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다음날인 1945년 9월7일 두 번째 테러가 일어났다. 몽양은 20여 일 간 치료를 받았으며 그가 정치활동에 나서지 못한 동안 인민공화국의 기반은 박헌영에게로 넘어갔다.

 

1946년 5월8일에는 몽양을 노린 수류탄 투척 테러 미수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해 7월에는 3인조 권총 테러범이 몽양을 납치, 정치 포기각서를 강요하고 살해하려고 했다.

 

이듬해(1947년) 3월에는 몽양의 자택이 폭파됐으며 5월에는 총격사건이 일어났다. 정계의 모든 인사가 몽양의 암살을 예상했다. 그러나 몽양은 좌우합작의 뜻을 접지 않았다.

 

조 교수는 몽양의 기개를 높이 칭송하며 "절규의 역사적 가설이지만 몽양의 역할이 연장될 수 있었다면 단선단정(單選單政)의 역사는 능히 반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 교수는 또 "남북정상 간의 6ㆍ15공동선언으로 몽양은 확실히 부활했다"며 "험로를 헤쳐나간 몽양의 낙천과 신념은 오늘날 통일을 이루는데 더 없는 보약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19일 오후 열리는 학술대회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축사에 이어 대선주자 6인이 연설자로 나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주제로 3분간 자신의 견해를 밝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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