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하늘에 솜털구름이 한가롭다. 농익은 여치소리를 타고 이따금씩 불어오는 소슬바람이 산능선 너머로 불볓더위의 등을 막 밀어내는 참이다. 가을이 여름과 임무교대를 치르는 산록에서는 철이 오고감을 자축하는 꽃다발 잔치를 벌어지고 있다. '하늘 위의 꽃밭' '구름 속의 꽃동네'로 불리는 지리산 노고단의 지금 모습이다. 눈이 마주치는 곳마다 수채화이고 카메라 프레임에 담기는 마디마디가 그림엽서이다.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 만큼이나, 또는 그 보다 훨씬 더 짙은 감동으로 계절의 바뀜은 성대한 의식을 치르는 모양이다. 지금 노고단 야생화 마당은 싱그럽고, 예쁘고, 컬러풀하고, 환상적인 기운이 극에 이르러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오래 그리던 연인을 대하는 것 만큼이나 마음을 들뜨게 해준다. 노고단이 '하늘의 화단'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구름이 허리를 감고 있는 산 머리쯤에 싱그럽고 화려한 꽃들이 많이 피어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람의 손길을 전혀 타지 않은 채 자연 그대로인 야생화 원초의 모습으로 모여있는 것이어서 귀하기 이를데 없다.
티없이 맑고 푸른 하늘과 띄엄띄엄 떠있는 새하얀 구름, 가까이 멀리 진록색과 안개빛으로 드리워진 산 능선, 이런 자연색을 배경으로 펼쳐진 '하늘위의 꽃밭'이란 이 무렵 자연이 주는 최고의 꽃다발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난히 지겹고 길고 변칙적이던 여름더위가 물러간 뒤라 지금 노고단에 피어있는 20여 가지의 여름꽃과 가을꽃들의 자태는 여느때보다도 반갑게 다가온다. 전에 없던 기상이변으로 우리 주위의 자연모습에도 이상이 생길까 걱정했으나 노고단의 야생화들은 예전의 그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고단은 남원이나 구례쪽 평지보다 기온이 5도 이상 낮은 곳이어서 언제 더위가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서늘하다. 올해는 늦게까지 기습적이고 빈번했던 폭우가 하늘을 깨끗이 씻어준 탓인지 하늘색과 지리산 능선 산빛깔에 대비되는 노고단 야생화들의 색깔이 훨씬 도드라져 보인다.
시멘트와 매연을 이웃하며 사는 도시인들에게 자연 속 아름다움의 극치인 이런 야생화를 보는 일은 문명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청소해줄 수 있는 기회이다. 스트레스는 사람 몸 안에 있는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을 자극하여 아세틸콜린 등 장기를 긴장시키고 약화시키며 결국은 병에 이르게 하는 독성 물질을 분비한다고 한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은 '행복물질'로서 우리 눈을 통해 몸 안에 들어가 부교감신경을 자극하여 스트레스에 의해 분비된 인체내의 독성물질을 완화하는 작용을 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건강에 해롭다는 말이나, 반대로 자연을 벗함으로써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말이 과학적 근거를 갖는 것이다.
노고단 생태계는 '아-고산 생태계'라 하여 울창한 삼림과 나무가 자랄 수 없는 고산 사이 중간 위치에 있는 생태계로서 풀과 구상나무 등 키가 자잘한 나무들만 자란다. 노고단에서 40년 쯤 자란 가장 큰 구상나무의 키가 2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정상적인 가후라면 해마다 8월 중순이면 노고단은 계절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런데 올해는 늦무더위 때문에 철이 늦어졌다. 지금 노고단에서 계절이 바뀌는 모습은 영화 장면처럼 속도감이 있다. 가장 먼저 달라진 바람결과 함께 하늘이 한층 높아지고, 풀벌레들의 목청이 극성스런 소프라노가 되며, 들판의 색깔이 쇠어 간다. 그 가운데서도 들꽃들의 피고 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피할 수 없이 철이 바뀌고 세상만사가 변한다는 <주역> 의 가르침에서 한 치도 어긋나 있지 않다. 주역>
노고단 야생화 꽃밭엔 지금 원추리, 이질풀꽃, 동자꽃, 참취꽃, 곰취꽃, 도라지잔대꽃, 모싯대꽃, 꿩의비름꽃, 며느리밥풀꽃, 기린초꽃, 며느리밑씻개꽃, 짚신나물꽃, 마타리꽃, 범꼬리꽃, 옥잠화, 구릿대꽃, 물매화, 여우팥꽃, 노루오줌꽃 등이 곱게 피어 서로 몸을 비벼대고 있다.
지리산 야생화들은 노고단 올라가는 길목인 구례군 광의면 천은사 들머리에서부터 피어 손님들을 맞는다. 짚신나물꽃과 며느리밥풀꽃, 이질풀꽃, 구릿대꽃 등은 성삼재 주차장에서부터 노고단에 이르는 등산로에 무더기로 피어있다.
야생화들에 대한 공부를 미리 해 가거나 다른 등산객들과 함깨 야생화에 담긴 사연이나 이름에 얹힌 이야기를 나누면서 노고단에 오르면 노고단 야생화와의 만남이 한층 정겹고 가슴에 깊이 새겨질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 정서의 자양분이 되어 쌀쌀한 가울과 추운 겨울을 나는 데도 튼실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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