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다
벌초는 고향 지키는 작은형님이 했으니
머리 잘 깎으신 아버지 봉분 앞에 맑은 술 한 잔 올리며
오늘은
짐승처럼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고
낮게 엎드려 뉘우쳐 볼란다
잘나지 않아서
비록 학생부군으로 누워 계시는
얼굴 모르는 먼 조상일지라도
머리 조아리며 다시 한번
내 뿌리를 더듬어도 볼란다
그리고 나를 뿌리로 삼아 뒷날 열매로 맺힐
끄릿끄릿한 후손을 그려보려니
비로소 나 사람 같겠다
성묘 뒤엔 마을 정자에서 술추렴에
신난간난 요즘생활 팍팍한 세상살이
푸념으로 날 저무는 줄 몰라도 좋겠다
달은 높이 솟아서 세상 고루 골고루 비춰주듯
잘난 놈 못난 놈
가진 놈 없는 놈 오늘은 구별 없다
그러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람으로 사람스러운 오늘만 같아라
이 오붓한 시간이 또 한 해를 견디게 해주리니
달이 구름에 가려 떠오르지 않는다 해도
가장 고운 달은 가슴 속에 솟는
그리운 이의 얼굴 아니겠는가
돌아오라 사람들아
일곱 시간 아홉 시간 걸려서라도
더딜수록 반가운 게 고향일 테니
머언 먼 할아버지도 갓난아이들도
친구도 웬수도 멍석 가에 둘러앉아
네 슬픔 내 절망 죄다 풀어놓고 깍쟁이윷이라도 던질 양이면
오늘 밤 달그림자는 너와 나와의 천강에
만강에 비추지 아니 하겠는가
복효근 시인은
1962년 남원군 대산면 운교리에서 태어났다. 뒤로는 풍악산이라는 큰 산이 있어 가난으로 시린 등을 가릴 수 있었고 앞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 있어 마음이 넉넉했다.
1991년 「시와 시학」이란 문예지에 ‘새를 기다리며’를 비롯한 몇 편의 작품이 당선돼 등단했다.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가 있으며, 이 다섯 권의 시집을 간추려 「어느 대나무의 고백」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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