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함 딛고 지역 '문화의집' 꿋꿋이 이끌어 간다
'문화로 부강하고 행복한 대한민국의 미래전략'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문화관광부에서 수립한 '문화강국(C-KOREA) 2010' 비전과 '새예술 정책'은, 창의력이야 말로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적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래서 문화와 예술이 중요한 거다.
그런데도 아쉬운 점은 있다. 여전히 큰 틀에서 보면 휴먼웨어가 아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문화예술을 만들어가고 즐기는 건 사람이다. 문화도시란 건 결국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예술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곳을 의미한다.
수도권에 문화적 인프라의 8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는 비판의 핵심은 문화인력이 대부분 그쪽에 있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답은 단순하다. 지역에서 문화나 예술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드니까. 때문에 더욱 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지역의 문화예술현장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소중하다. 우리가 전북의 문화일꾼지도를 그리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먼저, 얼마 전 성황리에 끝난 '효자삼천 갯강놀이축제'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이준호(39세) 삼천문화의집 관장을 만났다. 이준호 관장은 군산 출신이지만 자신의 입으로 정확히 예기하자면 "광활한 들판을 보고 자란 옥구 촌놈”이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전주와 인연은 전북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88학번인 이준호 관장이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도 그 당시 시대 상황을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리라. 문화판과의 인연은 대학 때부터였다. 풍물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임실 필봉굿을 배웠다. 그는 "문화판의 그 짜릿하고 감동이 있는 현장”이 좋다고 한다. 천성이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것을 싫어하고 역동적인 것을 좋아해서 언제나 그의 몫은 행동대장이었다. 그런 생활이 몸에 배어서인지 집행위원장을 맡은 갯강놀이축제에서도 그는 줄 꼬는 일에서부터 의자 나르는 일까지 도맡아서 했다.
그렇지만 의외로 그가 관심 있는 분야는 문화기획과 연출이라고 했다. 사실 그런 싹은 이미 보였다. 사단법인 마당에서 주최하는 제1회 '문화기획아카데미'에서 최우수로 수료한 바가 있으며 2002년도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폐막작 조연출을 맡은 적도 있다. 10여년의 군산생활을 접고 다시 전주로 오게 된 계기는 전주공예품전시관 사무국장을 맡게 되면서이다. 그렇다면 군산을 떠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 십년 하니까 괜히 땅만 파는 것처럼 지치고 힘들더라고요. 서울하고 지방하고 차이 나듯이 전주하고 그 외 지역의 차이도 심하거든요. 역량도 그렇고 인식도 그렇고요. 일자리도 사실 없습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군산으로 다시 돌아갈 겁니다, 여건이 된다면요.”
전주공예품전시관 사무국장 일을 한 일년 하고 삼천문화의집 관장을 맡게 된 이후에도 그는 몸을 놀리지 않았다. '2006 전국문화의집 축제' 집행위원장, '2006 전국민족예술제' 실무팀장 등을 하면서 여전히 '땅만 파고' 있다. 그래도 여기는 주변에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좋단다. 서로 이해해주고 존중해주는 마음이 가장 소중하고 힘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서로가 서로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문화판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
효자문화의집은 '전라북도 문화나눔(바우처)사업'을 비롯하여 정말 많은 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때문에 김선태 관장은 회의나 협의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외지로 나대는' 관장을 대신하여 효자문화의집 살림을 실질적으로 꾸려가는 사람이 강현정(32세) 사무국장이다. 강현정 사무국장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사람이다. 두루뭉술하게 사람과 관계를 잘 풀어나가게 생겼다.
그러나 일처리는 야무지다. 현재 강현정 국장이 책임지는 사업은 30여개의 강좌 개최와 10여개의 동아리 운영지원, '사회취약계층 지원 문화예술교육사업' 책임운영, '삼천공간화사업' 지원 등,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녀가 야무진 것은 원래 체육을 전공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광대학교 생활체육과를 졸업하고 솔내청소년수련관 청소년지도사 생활을 거쳐서 지금의 효자문화의집으로 왔다. 일반적으로 문화체육이라고 해서 문화와 체육을 같이 묶지만 문화판과 체육판은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런 그녀가 문화판에 와서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합니다. 문화의집에 근무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습니다. 우리 동네의 살아가는 삶을 문화의집을 통해서 만나서 느끼고 나누는 삶이, 때론 낯설지만 작은 이야기꺼리들을 만들어 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재미있어집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천생 서비스 업종에 근무할 사람이다. 지금 하는 일이 문화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니 딱이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고되어도 그렇게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사업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사업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삼천 둔치를 깃발로 가득 메우면서 효자동과 삼천동을 들썩거리게 하였던 갯강놀이축제는 아직도 그 흥이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 기억에 남습니다. 지역주민과 한마음이 되어 어우러진 행사였습니다. 지역사람들의 힘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강현정 국장의 힘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 싶다. 강현정 국장은 그렇게 보면 볼수록 다부짐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도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문화관련 종사자들은 복지와 문화생활은 거의 접을 정도로 인내와 희생”이 따른다고 토로한다. 그녀 말대로 "능력 있는 활동가들은 좀더 나은 환경으로 계속 빠져나가고 있는 현실”이 바뀌길 기대할 뿐이다.
인후문화의집의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는 김현갑(30세) 씨는 고등학교 때 연극반에 들어가면서 문화판과 인연을 맺었다. "연극이 좋아서 연극반에 들어갔고 대학도 연극을 전공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못하고” 행정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기회만 되면 문화와 관련된 교양과목을 수강하였고,
아르바이트도 공연기획사의 기획서 써주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이력이 계기가 되어 문화의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평소 조용한 성격이지만 일을 통해서 사람들과 가까워지게 되면 이야기를 즐겨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행사 때 김현갑 국장은 소처럼 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모습만 보였다. 그런 그에게 숨겨진 열정이 많았다. 요리와 기계 만지는 취미가 있어 조리사와 굴착기 운전기능사 취득했다고 한다. 문화판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참 이색적인 이력이다. 열정이 없으면 못할 일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머리 속에 가지고만 있지 실행 못한다. 욕심도 많았다.
"내 삶과 일 그리고 문화에 더 많은 열정을 쏟고 싶습니다. 공연을 좋아하고 홍보기획 쪽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문화의집까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앞으로 이런 활동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싶습니다. 이미 대학원에 원서를 제출한 상태입니다.”
부러 어느 대학원이냐고 묻지 않았다. 아마도 필자와 같은 대학원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 많은 열정이 문화현장에서 꽃피길 바란다.
/이경진 문화전문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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