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중건 때와 위치.규모 거의 같아
조선왕조 개창 4년 만인 1395년(태조 4년)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광화문 위치와 흔적이 확인됐다.
그 결과 1864년(고종 원년)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할 때 정문으로 건립한 광화문과 위치는 물론이고 규모, 중심축이 거의 똑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광화문 원위치 복원을 앞두고 옛 광화문 터 일대를 발굴 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세운 광화문 기초 밑에서 경북궁 창건기 광화문 흔적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음을 확인했다고 1일 밝혔다.
문화재연구소 조사결과 광화문의 규모는 동서길이 34.8m, 남북최대잔존길이 14.5m로 밝혀졌으며, 태조 이성계 시대에 신왕조 정궁(正宮)으로서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광화문 건립에 앞서 지반이 허약한 뻘층과 모래층을 다지기 위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꽂은 파일의 일종인 지정말뚝도 촘촘히 확인됐다.
지정말뚝(80-140㎝, 두께 10㎝ 내외)은 30-50㎝의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으며 그 위로 마치 시루떡을 쌓듯 황색점토와 잡석을 번갈아가며 6단으로 쌓아 올린 기초판축부가 조성됐다.
또 그 위로는 큰 석재와 흑색 사질토, 잡석으로 쌓아올린 고종 때 광화문의 기초가 확인됐다.
지정말뚝층은 지표로부터 1.6m 깊이에서 확인됐으며, 태조 때 기초판축부는 1.3m, 고종 때 광화문의 기초는 0.7m 깊이에 형성돼 있었다.
연구소 조사단은 "경복궁 창건기 광화문의 위치나 규모 등에 대해서는 막연히 고종 중건기의 그것과 비슷했을 것으로만 추정됐으나, 이번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중건기 광화문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경복궁 정문으로 사용된 조선전기 광화문 기초 위에다가 지어 올렸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성과는 비록 광화문이라는 구역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고종 시대에 중건된 경복궁이 그 규모나 크기가 조선전기 때와 거의 동일했음을 엿볼 수 있는 증거라는 점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고있다.
경복궁은 임란 이전까지 조선전기 약 200년 동안 왕이 거주하는 조선왕조 왕궁으로 존재했으나, 임란 때 불타 버린 뒤 고종 중건 이전까지 약 250년 동안은 폐허화한 상태로 방치되다시피 했다. 대신 조선왕궁은 창덕궁으로 바뀌었다.
이번 조사에서는 또 광화문 기초 밑에서 다량의 고려시대 기와와 13세기 무렵에 유행한 고려청자 파편이 확인됨으로써 지금의 경복궁 일대가 한국 역사고고학계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고려시대 남경(南京) 중심부였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이 중 고려청자 파편은 돈(墩)이라고 해서 의자나 다른 물건을 올려놓는 받침대로 사용된 최고급품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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