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와 갈대 어우러진 '환상 교향곡'...생명의 장엄함에 감탄 연발
한국의 자연은 중국이나 일본의 장년기가 아닌 노년기 지형이어서 활화산이나 만년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을 뒷동산 같은 야산으로 이뤄진 산맥뿐이다. 따라서 자연으로 세계에 내놓을만한 게 별로 없다. 그런데 해마다 11월 이후 이듬해 3월초까지 해남 영암호와 고천암호에서 펼쳐지는 가창오리떼의 군무는 가히 세계적인 것이다. 무슨 허리케인이나 눈보라가 세차다고 한들 이렇게 장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생명체들이 모여서 강과 산을 이루고, 마침내 온 땅과 하늘을 생명기운으로 제압해 버리는 '살아 있는 우주'가 우리 곁에 있다. 겨울잠에 움츠려 있는 세상을 단번에 활력과 환희로 채워버리는 자연의 조화-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영암호(12월초)와 황산면 고천암호(12월 중순~3월초)에 가면 그 '생명마당'을 만날 수 있다.
어떤 조류학자는 17만 마리라고 하고, 100만 마리가 넘는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천암호의 물과 하늘을 덮고 있는 가창오리 무리를 보면 수를 센다는 것은 하찮은 일이 되고 만다. 생명이란 저렇게 발랄하고 장엄할 수가 있다는 사실에 힘이 솟구침을 느낄 뿐이다.
겨울 고천암호에 새까맣게 가창오리떼가 찾아오는 것은 최근에 생긴 일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산 간척지 현대농장과 그 주변 서해바다쪽에 몇 개의 작은 무리가 오락가락한 적은 있다. 또 가끔 천수만 주변 하늘에서 먹구름처럼 날아가는 가창오리 무리가 눈에 띄기도 했다.
그렇게 몇 개의 무리로 배회하던 가창오리떼가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한 군데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3~4년전의 일이다. 천수만 일대에서 떠돌던 가창오리떼는 11월 중순쯤 전라북도 군산과 충청남도 서천의 경계선에 있는 금강방조제(금강호) 안쪽에 모이기 시작했다. 서산간척지 논을 일찍이 갈아엎기 때문에 천수만 일대의 먹이가 점차 고갈돼 큰 무리를 지어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강호에서 한 보름쯤 휴식과 먹이사냥 기간을 보낸 가창오리들은 12월 중순 이후 고천암호로 내려온다. 더 따뜻하고 먹이가 풍부한 남쪽에서 가장 추운 나머지 겨울을 보내기 위해서이다. 고천암호는 갈대밭이 풍성해서 맘놓고 잠을 잘 수가 있고 주변 논에 겨우내 주워먹을 나락이 많이 깔려있다. 또 호수 안에는 붕어, 모치 등 민물고기와 바닷고기가 섞여 살고, 호수 바깥쪽은 걸쭉한 개펄에 파래나 돌김 등 진수성찬이 잘 차려져 있다.
올해는 기름유출사고로 태안 앞바다와 천수만 일부가 기름밭이 되었고, 그 여파가 전라북도 앞바다 일대까지 밀려오고 있어서 고천암호는 가창오리들에겐 더욱 절실한 쉼터이자 먹이밭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천암호 가창오리들은 하루 내내 주로 호수 안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온갖 쇼를 벌인다. 갈대밭 사이 에 앉으면 오리와 갈대가 구별이 안 된다. 새 '을'(乙)자 모양의 변종 갈대밭이 한군데 광활하게 더 들어섰구나 생각하면 된다. 그 오리들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별로 경계하지 않는다. "수많은 무리중에 하필이면 내가 다치랴..." 하는 심사인 것 같다.
가창오리들이 날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대개는 한쪽 방향으로 줄을 지어 날아가지만, 호수 위에서 앉을 자리를 찾아 갑자기 방향을 180도 바꿀 때는 몸뚱이만 햇볕에 반사돼 일제히 드러난다. 또 몇 개의 무리가 여러 방향에서 오가다 뒤섞일 때는 거대한 회오리 바람에 온갖 먼지가 휘날리듯 혼란스러운 모습이 연출된다. 그래도 부딪쳐 떨어지는 놈 하나 없다. 다만 거기에서 함께 붙어다니는 이웃이나 짝이 있을지, 오직 군중 속에 외로운 혼자만의 세계가 아닐지, 그러면서 그 거대한 사회가 어떤 기술로 통제.유지되며 이동하는지가 궁금해진다.
/여행전문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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