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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전북일보 신춘문예] 약속 - 서성자

“여러분들은 방금 군사 분계선을 넘어왔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안내원 아저씨가 감격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북한 이래요!”

 

“뭐가 어드래? 새봄이 너 지금 북한이라고 했넨?”

 

할머니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셨다가 다시 앉았다. 창틀을 잡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금강산이 바라보이는 온정각에 도착 하겠습니다.”

 

안내 방송이 계속 되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창밖만 바라보던 할머니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흙을 두 손으로 모아 냄새를 맡았다. 혀끝으로 흙을 맛보시던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흙속에 스며들었다. 나도 할머니 곁에서 흙을 만져 보았다.

 

금강산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할머니는 북쪽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철조망 사이사이로 코스모스들이 까치발을 들고 우리를 바라보고 저쪽 언덕에선 하얀 억새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중간 초소마다 군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저쪽만큼 학교가 보였다. 내 또래 아이들이라 반가워서 손을 흔들었다. 나를 보고 아이들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 아이들, 우리 새봄이 친구하면 좋갔구나야.”

 

할머니도 함께 손을 흔드셨다.

 

점심때가 가까워져서야 우리는 금강산에 도착했다. 일만 이천봉우리가 있다는 금강산에 첫발을 딛게 된 것이다.

 

신기한 모양의 바위, 푸른색이 감도는 계곡물이 사진처럼 아름다웠다. 크고 작은 나무, 작은 풀꽃들, 발아래까지 쪼르르 달려오는 다람쥐를 보느라 엄마와 나는 발걸음이 자꾸 뒤처졌다.

 

“새봄이랑 에미랑 어서 따라오라.”

 

언제 가셨는지 할머니가 저만큼에서 엄마와 나를 불렀다.

 

산으로 올라갈수록 여러 모양의 바위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빨간 단풍잎을 따서 아빠에게 선물하고 싶었지만, 풀 한 포기도 손대서는 안 된다는 안내원 아저씨의 말이 생각나서 꾹 참았다. 떨어진 단풍잎을 주워 얼른 수첩에 끼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깨끗한 계곡물도 빈 병에 채워 가방에 넣었다. 일 때문에 같이 못 온 아빠와 고모에게 갖다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내려오는 길에 할머니가 신발을 벗으셨다. 맨발로 천천히 걷기 시작하신 것이다. 바라보던 엄마도 신발을 벗었다. 관광객 몇 사람도 할머니를 따라서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나도 운동화를 벗어 양손에 들었다. 이번에 새로 산 빨간색 운동화였다.

 

걸어오는데, 잔돌이 발바닥에 밟혀 아팠다. 그러나 신발을 신고 올라갔던 때 보다 맨발로 내려오는 길이 더 정답게 느껴졌다.

 

버스를 타기 전에 흙 묻은 발을 씻으려고 골짜기 물에 발을 담갔다. 하얀 물거품을 만들며 내려가고 있는 계곡물은 발을 담그기가 미안할 정도로 맑았다. 차가웠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물 묻은 발을 닦고 돌 위에 올려놓은 운동화를 신으려다가 발끝에 채여 한 짝이 ‘풍덩’ 물에 빠져 버렸다.

 

“엄마, 내 운동화!”

 

얼른 손을 내밀었지만 놓치고 말았다.

 

엄마가 따라서 내려가려 했지만 어른 키를 넘을 것 같은 깊은 물길을 따라 떠내려가는 운동화를 잡을 수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두고 운동화는 점점 멀어졌다.

 

그때 할머니가 남은 한 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려가고 있는 빨간 운동화 쪽으로 ‘휙’ 던졌다.

 

갑작스런 할머니의 행동에 발을 씻던 사람들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운동화는 사이좋게 ‘동동’ 떠내려가고 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신기야요? 할머니, 말해 보시라우요?”

 

북쪽안내원이 뛰어 내려오며 말했다.

 

험악한 말투에 나는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저 물을 따라가면 내 고향이 나오겠디요. 내 고향 가는 걸 평생 소원으로 알고 살아왔디오.”

 

할머니는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러니끼니 할머니의 고향과 운동화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네까?”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북쪽 안내원이 다그쳐 물었다.

 

“내 딸과 약속을 한 게 있었디요.”

 

먼 곳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안 되겠시오. 따라오시라요.”

 

안내원은 할머니를 회색 건물로 데리고 갔다.

 

일행들은 수근 거리며 가슴을 졸였다.

 

“어쩌면 좋지? 몇 년 전에 말실수를 해서 붙잡힌 아주머니가 끌려간 곳도 저기였는데.”

 

남쪽 안내원 아저씨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저씨!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엄마와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할머니 뒤를 따라 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책임자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아주머니의 차가운 표정을 보니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사정을 해도 소용없겠다. 할머니만 이곳에 남겨두고 우리만 돌아가게 되면 어떡하지?’

 

아주머니는 북쪽안내원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었다. 그리고 할머니 목에 걸린 여행증을 건네받아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그때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나쁜 뜻은 전혀 없었디요. 새 운동화가 떠내려 가서리, 한 짝이면 소용이 없을 끼니께 나머지 한 짝도 같이 던진 것 뿐이었디요.”

 

“그러니끼니 지금 우리 공화국이 거지나라라는 말씀입네까? 거지처럼 운동화 주워서 신으라는 겁네까? 뭡네까? 더 들어볼 필요도 없습네다.”

 

책임자 옆에 서있던 군복아저씨가 말했다.

 

남쪽 안내원 아저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내 가슴도 콩당콩당 뛰고 다리도 덜덜 떨렸다.

 

“내가 알아서 처리 할 끼니 동무는 가서 일 보시라요.”

 

아주머니의 말에 군복 아저씨가 밖으로 나갔다.

 

“이보시오. 높으신 양반 내 말 좀 더 들어보기오. 아까 신발이 떠내려갈 때 기냥 그 신발이 아까워서리 누군가 주워 신으라는 에미의 마음이었지 다른 마음은 전혀 없었디요.”

 

그러나 책임자 아주머니는 할머니의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서류만 들추었다.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내레 남쪽에 있는 영감을 찾아 둘째를 업고서리 큰집에다 어린 딸을 맡기며 약속을 했디요. 데리러 올 때 새 신발을 사가지고 오겠다고. 결국 내가 떠난 얼마 후, 열병으로 죽었다는 소식만 들었디요.”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 책임자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아주머니가 침을 꼴깍 삼켰다.

 

할머니의 눈 가장자리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몸도 건강하지 않으세요. 고향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가슴 병을 앓고 계시단말이에요.”

 

나도 모르게 울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조용히 하라며 나를 달랬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를 달래는 엄마도 울고 있었다.

 

볼펜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던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할머니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뒤로 숨었다.

 

“눈물 닦으시라요.”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내래 고저 우리 동지고 오마니 같아서 봐주는 기라요.”

 

아주머니는 서류를 찢어서 휴지통에 넣었다.

 

“고맙습네다. 고마워요.”

 

“그리고 이거, 맞을지 모르갔시오. 이 신발이라도 신고 가라요.”

 

아주머니가 신발장에서 파란운동화를 꺼내 내 발 앞에 놓았다.

 

나는 엄마와 아주머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신발안에 발을 넣었다. 약간 컸지만 양말을 껴신으면 맞을 것 같았다.

 

“고맙습네다.”

 

“고맙습니다.”

 

할머니와 내가 동시에 인사를 했다.

 

“뭐, 일 없습네다.”

 

남쪽 안내원 아저씨가 밖으로 나가 창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활짝 웃으며 팔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할머니가 나오려고 하는데 책임자 아주머니가 할머니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 외할머니도 남쪽에 있시오. 고향은 강원도 철원, 이름은 김성임이야요. 우리 오마니는 아직도 외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시요.”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할머니가 또 한 번 눈물을 닦았다.

 

할머니가 북쪽 아주머니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었다.

 

내가 신은 파란 운동화에 가을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내 빨간색 운동화를 싣고 떠난 계곡에도 햇살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맑고 푸른 물은 남과 북의 소망을 싣고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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