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지색 벽면은 하얀 얼룩들로 번져있었다. 환경미화 아주머니와 수백 번을 싸운 흔적이었다. 그 속에 과거의 낙서들이 화석처럼 흐릿하게 묻혀있다. 나는 휴지걸이를 들추어보고 변기물통의 벽면을 돌아봤다. 간혹 생소한 낙서들이 보였지만 글씨체가 달랐다. 며칠 전부터 그의 낙서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 그 낙서를 발견한 것은 6개월 전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사유서 제출 건이 많았다. 스트레스가 머리꼭지까지 올라왔다. 담배생각이 간절했다. 금연빌딩이 된 후로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골초들은 여전히 화장실에서 공공연하게 담배를 피웠다. 구석진 곳에 있는 변기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바로 위에 공기정화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유서를 펼쳐보던 중 휴지걸이 뒤 벽면에 깨알 같은 글씨를 발견했다. 글씨는 대충 휘갈긴 듯 성의 없어 보였다.
<당신은 탑 속에 갇혀있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여기가 탑인 줄은 알고 있나?>당신은>
낙서를 도서관이나 거리화장실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회사에서는 처음이었다. 어찌 보면 여러 회사가 사용하고 있으니 공중화장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분명 다른 건물의 회사 직원이 외근 나왔다가 심심풀이로 적고 간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 자기 회사에 버젓이 낙서를 하는 위인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좀 아쉬웠다. 음담패설이나 보다 직설적인 표현도 괜찮을 듯싶은데.
나는 펜을 꺼내 답변을 썼다.
- 이렇게 멋지고 높은 탑 보았소? 당신 혹시 이 탑에 들어오기 위해 안달이 난 건 아닌가? -
별 생각 없이 적은 것인데 이틀 후에 가보니 내 글씨 밑으로 보란 듯이 답변이 적혀있었다.
<바보 같은 놈. 진정한 바보는 스스로 돌아볼 줄 모른다. 내가 탑을 동경할 아나? 나도 이곳에 살고 있다.>바보>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배변도 이뤄지지 않았다. 펜을 가져오지 않은 탓에 담배만 한 대 피우고 당장 사무실에 달려가 펜을 가져왔다.
- 탑 속에 갇혀있다고 믿는 당신이야 말로 정신병자다. 탑은 당신을 가둬놓은 적 없다. 당신 스스로 갇힌 것이지. 그리고 이럴 시간 있으면 사회봉사나 해라. 하긴 탑 속에 갇혀서 나가지도 못하겠구나. 무능력한 불만분자 같으니. -
이렇게 누군가와 낙서대화는 시작되었다. 그가 적어놓으면 내가 답변을 하고 또 2,3일이 지나면 어김없이 그가 답변을 했다. 날이 갈수록 표현은 과격해지고 상호 비난조가 되었다.
<정신병자 낙서라면서 그렇게 진지하게 대꾸하다니……. 당신도 정상은 아닌 것 같군. 열심히 남의 의견을 무시하니 악플러 소질도 다분히 보이고. 혹시 온라인에서 뛰쳐나온 건가?>정신병자>
- 악플러라는 말을 쓰는 것 보니 인터넷에서 상처 많이 받았나보구나. 상처받아서 진출한 곳이 고작 화장실이냐? 이런 신성한 곳에서 더러운 입을 나불대다니. 회사에서 왕따인가 보군. 숨어서 낙서나 하고 있고. -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깨알 같은 낙서들이 제법 벽면을 차지하였다. 유성 펜이 지워지지 않아 환경미화 아주머니들이 그냥 방치해 둔 것이었다. 낙서들은 휴지걸이 부근에서 시작해 벽면을 타고 올라갔다. 낙서 량이 증가한 것은 가끔씩 제3자도 심심풀이로 낙서를 했기 때문이었다. 벽면의 반 정도가 채워지자 아주머니들이 화학물질 같은 것들로 지우기 시작했다. 낙서는 가끔씩 희미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당신 때문에 낙서가 번지고 있다. 자제해라. 게다가 회사 아닌가. 당신은 애사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것 같군. 청소 아주머니께 미안하지도 않나?>당신>
- 애초에 낙서를 시작한 건 당신이다. 가슴에 손을 얹어보아라. -
<무지 덥군. 야근하는 데 에어컨도 안 켜주는구나.>무지>
- 무능력하니까 야근을 하지. 에어컨보다 당신 능력을 더 키워! -
<지랄 같은 상사 때문에 오늘 완전히 헛물 켰다. 그 놈만 없으면 다닐만 할 텐데. 혹시 당신이 놈이 아닐까?>지랄>
- 맞다. 내가 그 놈이다. 너 같은 놈을 부하직원으로 두어서 나도 다닐 맛 안 난다! -
농담반 진담반 낙서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가까워졌다. 비꼬는 어투나 냉소적인 태도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마치 고등학교 단짝 같은 느낌이었다. 진한 욕설은 친근함이 배어 있고 죽도록 싸웠다가도 내일이면 거리낌 없이 어깨동무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낙서는 우리 둘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층에 불특정 남자 직원들도 보고 있었다. 입사동기인 정철도 그중에 하나였다.
"너 혹시 화장실 낙서 봤냐?”
"무슨 낙서?”
나는 짐짓 모른 체했다.
"담배 피우는 변기 있잖아. 구석진 곳에 있는 거.”
정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마른 체구에 새하얀 피부는 목소리와 제법 어울렸다.
"봤어. 꼴사납게 나이 먹어서 무슨 짓인지 몰라. 벽만 지저분하게.”
"누가 제우스 이야기는 안 써줄까?”
정철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그러나 농담인지 진담인지 쉽게 구분이 안 갔다. 그것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제우스? 우리가 쓰는 프로그램?”
"응.”
"그랬다간 단박에 들키지. 그거 사용하는 것은 우리 부서뿐인데. 팀장 귀에 들어가면 난리날 걸.”
"누가 했는지 어떻게 알겠어?”
"너 팀장 성격 알잖아. 누가 썼건 간에 분명 사무실 뒤집어 놓을 거라고.”
낙서는 익명성이 보장되기는 했지만 상세한 회사 이야기는 자제해야 했다.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적정선을 유지했다. 내용들도 대부분 업무 스트레스에 관한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참견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우리 글에 댓글을 달거나 대화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왈가왈부 떠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무시했다. 낙서의 원조는 우리였고 왠지 다른 글들은 정이 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낙서는 점차 신상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딸아이를 보면 눈물이 난다. 와이프를 왠지 아나? 나의 한계 때문이다.>딸아이를>
- 나는 결혼 안 했다. 아니. 솔직하게 못했다. 결혼 못한 나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라. -
그는 가장이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은 대략 돈이나 회사 진급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벌이가 시원찮은가? 회사원 봉급이 많아 보았자 오십 보 백보 일 텐데.
<숫자가 나를 짓누른다. 사람은 숫자로만 살 수 없지 않은가?>숫자가>
실적에 허덕이는 샐러리맨이 떠올랐다. 숫자는 샐러리맨에게 인격이다. 인격을 높이려면 숫자를 높여야 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신용카드 특수 관리팀이다. 신용카드 부정사용을 사전에 방지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적발건수를 높이는 것. 카드 사고를 방지하는 비율이 내게 부여된 숫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숫자를 높이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올해 초에 도입한 엉터리 시스템 때문이었다. 그 시스템은 카드사고가 아니라 사람을 잡았다.
"예전처럼 일일이 확인할 필요 없다. 이 프로그램이 속 시원히 해결해 줄 것이니까. 이제 인원도 줄이고 비용도 절감될 거야.”
프로그램의 공식명칭은 '제우스 프러드 매니저(Zeus Fraud Manager)'였다. 팀장은 프로그램이 제우스처럼 사고들만 골라서 번개처럼 보내줄 것이라 했다. 처음에는 우리들도 그렇게 믿었다.
"앞으로 이것만 사용해야 된다. 이 프로그램의 뛰어난 효율을 수치로 보여 달란 거다.”
팀장은 연일 제우스의 우수성에 열변을 토했다.
"미국에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 수입한 거야. 충분히 그 값을 할 거다. 카드 사고의 패턴들이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입력되어 있지. 제우스는 의심되는 카드 사용들만 골라서 실시간으로 쏴 줄 거야. 예스나 노만 결정하면 돼. 예전처럼 일일이 카드사용 목록 전부를 훑을 필요 없어.”
그러나 제우스가 보내주는 사건들은 대부분 정상거래였다. 안 쓰던 카드로 오랜만에 100만원 대출받으면 어김없이 모니터에 부정사용이라는 메시지를 띄웠다. 제우스가 적발한 1000건 중에 2,3건 정도만 진짜 사고였다. 그런 무용지물의 제우스를 이용해서 수치를 높여야 되는 것이었다.
나는 답변을 했다.
- 나 또한 숫자에 얽매여 있다. 그러나 별수 있는가? 숫자는 인격이다. -
<숫자가 인격이라면 나는 패륜아 수준이다. 너무 심한 자학인가? 당신과 달리 타인에게도 숫자를 강요한다. 만약 거부하면 맞출 때까지 다스려야 한다. 그 자체가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매일 바위를 굴려야>숫자가>
그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남에게 숫자를 강요한다면 낮은 직위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높은 사람이 이런 곳에 쭈그려 앉아 낙서나 하고 있을까? 낮은 직위면서 남에게 숫자를 강요하는 사람이 있을까?
20층 빌딩 중에 이곳은 15층. 이 건물은 신용카드 본사였다. 회사는 현재 타 은행에 인수절차가 진행 중이어서 올해 안으로 이전될 계획이었다. 그래서 타 회사들도 이 건물에 이주를 한 상태였다. 15층에는 우리 팀이 소속된 리스크 본부가 있고 나머지는 위층에 있다. 같은 층의 타 회사라고 하면 온라인게임회사, 해운회사, 신용정보회사 세 곳이 있었다. 그는 어디 소속일까?
나는 게임회사 직원인 것처럼 글을 써보았다.
- 지금 개발되는 게임이 완성되면 한몫 잡고 숫자에서 벗어날 것이다. 누구든지 희망은 있다. 당신과 당신이 강요하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희망은 있을 것이다. -
<게임 속은 모든 게 허용된다. 괴물을 죽이고 사람을 해쳐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여기는 현실이다. 당신은 현실에서 그렇게 할 있나? 실제로 죽는다. 그것은 유희가 아니라 생존이다. 나는 매일 보고 그런 생각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게임>
그 낙서는 나를 망설이게 했다. 펜을 들었지만 쉽사리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문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실제로 죽이고 죽는다. 그것은 유희가 아니라 생존이다.'
한낱 낙서일 뿐이라고 되새겨 봤지만 계속해서 떠올랐다. 퇴근길 전철에서 책을 들었지만 내용이 읽히지가 않았다. 낙서는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매번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흔한 내용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문구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역에 정차하며 퇴근길의 인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왔다. 나는 구석까지 밀려들어갔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문득 이들 중에 몇 명이나 낙서 속의 사람들에 해당될까 생각했다.
전철이 다음 역에 도착할 즈음에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다음 역에 거의 다 도착해서 멈춰버린 것이었다. 내가 타고 있는 칸은 제일 앞쪽 기관차 칸이었다. 역내에 사람들이 기관차 쪽으로 몰려들었다. 전철 밖 곳곳에서 끔찍한 표정들이 보였다. 저마다 입을 막았지만 눈은 또렷했다. 게 중에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이도 있었다. 몰려있던 무리들이 갈라지며 안전요원이 나타났다. 동시에 수습 중이라는 간단한 방송이 나왔다.
그때 전철 안에 누군가 말했다.
"자살했나봐.”
"허…….”
"왜 하필 이 시간에 자살하고 지랄이야.”
"이유가 있었나보지.”
"죽으려면 혼자 아무도 모르게 죽던가.”
그들은 대학생들 같았다.
잠자리에 들기까지 여전히 낙서들이 떠올랐다.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 TV를 켰다. 자정 뉴스에 퇴근시간의 그 자살사고가 나왔다. 모자이크한 누군가 플랫폼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탔던 전철이 두 눈을 부릅뜨며 어둠에서 나타나 그 위를 지나갔다. 흑백의 화면은 조금의 과장도 없이 담담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담담했다. 50대 가장의 자살 동기는 숫자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어? 요즘 왜 이리 실수가 많아?”
팀장은 내가 제출한 사유서를 허공에 휘저었다.
"평소에 3,4건 하던 것을 하루에 7건이나 하면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냐?”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팀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제우스는 점점 우리들을 궁지에 몰았다. 목표치는 올라가고 사유서는 늘어갔다. 팀장은 수치가 낮게 나오는 것을 우리 탓으로 돌렸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이 검토하고 판단도 빨라야했다. 그것도 올바른 판단으로. 실수는 곧 사유서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에는 이미 제우스가 보낸 사건이 떠 있었다. 사용자는 필리핀 마닐라의 백화점에서 400달러 값어치를 구매했다. 최근 구매내역은 보름 전 서울이었다. 해외여행 시 대체로 국내면세점에서 먼저 구매를 하고 해외에 도착해서 구매하기 마련이다. 해외에 나가면서 면세품을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사용자는 해외에서 바로 400달러나 구매한 것이다. 사고가 아닐 수도 있지만 일단은 확인을 해야 했다. 사용자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회사번호도 없다. 이번 건은 사고일까? 정상일까? 머리 속에서 어제 보았던 TV속의 50대 남자가 떠올랐다. 스스럼없이 뛰어내리는 모자이크의 남자. 그리고 숫자…….
나는 정상으로 체크했다.
점심시간의 공원은 회사원들로 붐볐다. 따사로운 햇살이 사람들을 빌딩 밖으로 끌어낸 것이다. 정철과 나는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나는 요즘 회의가 들어.”
정철은 햇살에 눈을 찌프렸다.
"너는 이번 달도 무난히 목표 달성할 것 같던데. 뭐가 걱정이야?”
"왠지 이건 아닌 것 같아.”
나는 정철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었다.
"정철아. 네가 남 부러울 게 뭐가 있어? 집도 있겠다. 와이프에, 딸아이에, 갖출 거 다 갖추었지. 팀에서 실적도 제일 높지. 팀장한테 인정받지.”
정철은 무언가가 목에 걸린 듯 계속 침을 삼켰다.
"두려워.”
정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새하얀 정철의 얼굴이 문득 병자처럼 느껴졌다.
"뭐가 두려워?”
"문득 어제 생각난 건데. 지난 삼십년 동안 나는 지시만 받아왔어. 부모님, 큰형, 선생님, 지금은 회사.”
"누구나 그렇지. 안 그런 사람 있나? 이젠 너도 부모가 되었으니…….”
정철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괜한 말 한 것 같다.”
그리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두렵다는 말은 정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전철에 뛰어드는 사람의 심정을 정철은 이해할까? 괜한 허영심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배부른 소리였다. 문득 낙서의 주인공을 찾아 정철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었다. 현재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불쑥 그를 찾아가 직접 대화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모든 것을 탁 터놓고 밤새워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나는 그 동안의 낙서들을 떠올렸다. 그는 실적이 낮은 샐러리맨이다. 가족도 있다. 돈 때문에 사생결단난 사람들을 자주 접한다. 또한 그 사람들에게 돈에 관련된 것을 강요한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는 게임회사도 해운회사도 아닌 것 같다. 돈과 관련된 것은 우리 부서와도 연관이 있지만 강요를 한다는 점은 신용정보회사에 더 가깝다. 그 신용정보회사는 모 카드회사 채권추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신용정보회사 사무실을 슬쩍 들어갔다. 대부분 외근을 나간 듯 사무실은 반수 정도가 비어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거대한 현수막이 보였다. 시뻘건 바탕에 흘려 쓴 서체가 마치 공산국가의 슬로건 같았다.
'국가경제를 위하여 악착같이 회수하자.'
'독종같이 회수하여 위기극복 앞당겨라!'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보드에 개인 실적표가 붙어있었다. 개인마다 그래프가 할당되어 공개적으로 실적이 체크되었다. 아직 달 중순이었지만 목표치를 돌파한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평균을 뜻하는 붉은 선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그 중 한 명만 시작점 부근에서 멈춰있었다. 사무실을 둘러보며 그 이름이 붙어있는 책상을 찾았다. 그는 외근 중이었다. 대신 모니터 위에 사진액자가 놓여 있었다. 초등학생 딸과 아내와 같이 찍은 것이었다. 40대 초반에 작은 키와 마른 체격이었다. 고교시절 신경이 예민했던 수학선생과 닮았다. 항상 검정 정장에 도수 높은 커다란 금테 안경을 썼었던, 말수도 적고 가끔씩 농담을 던져도 사무적인 말투 때문에 분위기만 가라앉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커다란 덩치에 짧은 헤어스타일의 남자였다. 이곳의 관리자 같았다.
"옆에서 왔습니다.”
나는 명함을 건넸다.
"채권업무에 관심 있으세요?”
"아니요. 그냥 지나치다 저것이 눈에 띄어서 한번 들러봤습니다.”
나는 현수막을 가리켰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니까요. 아까 보니까 이분 사진을 유심히 보던데.”
그는 내가 보았던 사진 액자를 가리켰다.
"사실은 저 실적표를 보고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하는 분이죠. 다만 이번 달에는 조금 부진하네요.”
"그렇군요.”
"아마 저분은 다음 달에 여기를 떠날 겁니다.”
"무슨 일 있나요?”
"요즘 채권업무가 많이 줄었어요. 신용도 많이 호전되었고요. 예전처럼 마구잡이로 발급을 안 하니까요. 대부분 채권보다 대출 쪽으로 많이 갈 겁니다.”
"그러면 지금 업무보다 편해지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죠. 그것도 영업이니까요.”
과연 사진 속의 남자가 낙서의 주인공일까? 이제까지 낙서들을 봐서는 그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최근 실적도 안 좋고 딸아이와 아내가 있으며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내는 업무까지 들어맞는 것 같았다.
"그 분은 사실 나이가 좀 많아요. 다른 일을 하다가 이 일을 하게 되었는데…….”
신용정보 관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나는 그동안 미뤄왔던 답변을 적었다.
- 아직 미혼이고 업무도 당신보다는 자유롭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매일 바위를 굴려야 하니까요. 지겹고 힘들겠지만 그러다보면 분명 탑을 떠날 때가 올 겁니다. -
답변을 적고 나오려는데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팀장님. 그만 접어야 합니다.”
"너 도대체 오늘 왜 이래!”
정철과 팀장이었다. 둘은 흥분된 목소리였다.
"이럴 바엔 차라리 예전처럼 인원 늘리고 일일이 검토하는 것이 더 효율적입니다.”
"활용을 못해서 그래. 너희가 너무 느리니까 결과가 그 따위로 나오는 거 아냐!”
"저희 탓만 하지 마세요. 그리고 직원들 모두 같은 생각이에요. 제우스는 엉뚱한 곳만 번개를 때린다고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런데 왜 너만 혼자 난리야!”
"다들 입 다물고 있으니 제가 대표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철의 말은 모두 옳았다. 제우스는 모든 팀원의 불만이었다. 다만 말을 못할 뿐이었다.
"너 다시 봐야겠다. 조용하고 차분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팀장은 호통을 치고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는 정철 혼자 남은 듯했다.
"정철아. 무슨 일 있냐?”
정철은 아무 말 않고 세면대 거울만 바라봤다.
"나 정말 놀랐다. 이 안에서 정말 부들부들 떨었다고. 어떻게 팀장한테 그렇게 대들 수가 있니?”
정철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입사 후 처음이었다.
"네가 말한 거 팀장도 알고 있어. 효율 떨어진다는 거. 그런데도 폐기 못한다는 건 알잖아.”
제우스는 수 억짜리였다. 매달 유지비도 몇 천 만원이 나간다고 했다. 만약 실패한 시스템으로 판명되면 도입한 책임자들은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회사는 현재 다른 은행에 인수절차를 밟고 있는 형국이었다. 정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퇴근 후 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며칠 전부터 상당히 예민 해보여. 평소 네 모습이 아니야.”
정철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었다.
"아까 화장실사건도 그래. 그거 제정신으로 말한 거냐?”
정철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올해 진급심사인데 그렇게 초치면 어떻게. 진급이나 하고 말하던가. 아님 내년에 타부서로 옮기면서 말하던가.”
"그냥 말하고 싶었어.”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저 프로그램 팀장 목숨이 달린 거라고.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냐?
정철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원체 말수도 적고 입도 무거워서 평소 내가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편이었다. 그런 점은 여전했지만 어딘가 달라 보였다. 그동안 참았던 것이 폭발한 것일까?
정철이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탁자가 심하게 울리며 주변 시선이 우리한테 쏠렸다.
"너 요즘도 화장실에 낙서 보고 있니?”
"예전에 말했던 그 낙서들?”
"응.”
"가끔씩 보기는 하지.”
"누가 썼을까?”
"글쎄. 왜 그렇게 낙서에 관심이 있는 거야?”
정철은 꼬부라진 발음으로 말했다.
"읽을 때마다 느낀 건데. 왠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느리고 여린 목소리. 정철은 술에 취해도 톤이 높아진 적이 없다.
"네 이야기? 글쎄. 나도 몇 번 읽어봤지만 너하고 어울리는 글은 별로 없던데. 써 놓은 것 보면 온갖 푸념에다가 열등의식만 꽉 들어차 있잖아.”
정철은 말없이 술만 따랐다. 혹시 낙서를 읽고 심경의 변화라도 일으킨 것일까? 말 그대로 낙서에 불과할 뿐인데. 아마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상황으로 봐서는 이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 팀장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들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날 술자리에서 헤어지면서 정철은 꼬인 말투로 말했다.
"성호야. 부탁이 있는데.”
정철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나중에 그 낙서…….”
"그거 왜?”
"낙서 주인공을 찾아서 말해줘.”
"뭐라고?”
"나는 탑을 빠져나갔다고.”
"탑?”
"응. 제일 처음 누군가 거기다 썼었어. 탑이라고.”
"넌 역시 심각해. 누가 신세한탄하면서 끄적거린 것 뿐이라고.”
"그래. 알아. 반드시 말해줘야 해.”
정철은 비틀거리며 거리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멀찌감치 정철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술 취해 걷는 모습이 속이 비어버린 허수아비 같았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정철은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글쎄요. 도통 연락이 안 되네요. 집에서도 모른다고 하구요.”
팀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같이 술 마셨다면서 뭔가 없었어?”
"특별한 건 없었어요. 팀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정철이 성격이요. 다만 기운이 없어 보이기는 했어요.”
"회사는 그렇다고 쳐도 처자식 놔두고 어디로 내 뺀 거야?”
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집에 전화해보니 와이프가 일단 경찰에 신고했답니다.”
"그래서 찾고 있데?”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은가 봐요. 대개 이런 경우 제 발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요.”
내가 전화를 했을 때 정철의 아내는 지쳐있었다. 아기울음소리에 오래 통화는 못했지만 아내는 남편의 실종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정철은 그날도 평소처럼 오전 7시에 출근했다고 했다.
"정철이가 상담을 받았었나봐.”
"무슨 상담이요?”
"거 있잖아. 열 받거나 짜증나면 가는 곳.”
팀장은 회사가 운영하는 상담센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업무로 스트레스 받는 직원들을 위해 회사 측에서 배려한 병원이었다.
"혹시나 해서 거기 문의해 봤지. 처음에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더라고.”
"그렇죠. 대부분 비밀로 하니까요.”
"불안장애가 있었데.”
"불안장애요?”
"별일 아닌데도 쓸데없이 걱정하는 거 있잖아. 직장에서는 가족 걱정하고. 집에서는 업무걱정하고.”
"이해가 안 가네요.”
"맞아. 내말이 그거야. 내가 알기로 그 놈은 아무 문제없어.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예쁜 마누라와 자식도 있잖아. 재무구조도 튼튼해. 빚도 없다고. 오히려 걱정이라면 내가 많지.”
팀장은 눈을 찌푸렸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죠.”
"그때 제우스 이야기할 때 알아봤어야 했어. 그런데 너는 이상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부터 정철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이렇게 극단적일 줄은 몰랐다. 어쩌면 정철이 집과 회사에서 완벽했던 이유가 불안장애 때문은 아닐까 생각 들었다. 사소한 일도 걱정이 되고 걱정하면 불안하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정철은 자신의 온 힘을 쏟지 않았을까 생각 들었다. 온몸의 신경들이 바닥 날 때까지. 어쩌면 그것이 정철을 막다른 곳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이하게 정철이 무단결근한 날부터 화장실의 그 낙서도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쓴 낙서 이후로 답변이 없었다. 화장실 벽면은 낙서를 지운 화학물질로 하얗고 커다란 얼룩들만 남아있었다.
나는 신용정보회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실적표의 주인공이 자리에 있었다. 누군가와 정신없이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만큼 과묵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목소리도 크고 말도 빨랐다. 벽에 걸린 실적표를 보니 그의 그래프가 평균을 넘어 제법 순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는 낙서의 주인공이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정철이 낙서의 주인공이 아닐까? 단순히 그의 실종과 낙서의 소멸이 연관되었다.
보름이 지나자 결국 정철은 해고 처리되었다. 그동안 우리들은 정철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팀장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평소보다 말수도 적어졌고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충격은 우리 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정철의 행방불명을 나름대로 해석했지만 제우스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표면적으로 정철은 제우스를 반대했지만 정작 업무에서는 제우스를 이용해 가장 높은 실적을 냈기 때문이었다.
낙서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정철이 해고된 날이었다. 화장실에 갔을 때 막 팀장이 그 변기에서 나오고 있었다. 변기는 팀장의 온기가 남아있어 따듯했다. 담뱃불을 붙이던 중에 휴지걸이 뒤로 낙서를 발견하였다. 귀찮은 듯 혹은 해탈한 듯 흐느적거리는 글씨는 예전 그대로였다. 나는 몇 년 만에 만난 단짝처럼 반가운 나머지 낙서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잉크가 손끝에 묻어나며 글씨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허리가 하얗게 잘린 글씨는 왠지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낙서는 의미심장했다.
<제우스는 죽어야 한다.>제우스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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