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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문서의 향기] 인장의 사용

서압(署押, 사인)에서 도장으로

1901년 최인풍이 정읍군수에게 올린 청원서. '정읍군인'과 '정읍군수지인'의 인장이 사용되었다. ([email protected])

현대 사회에서 사인(서명)은 도장에 버금갈 정도의 법적 강제력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반드시 도장을 찍어야 했던 많은 서류들이 이제는 서명으로도 가능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서명(사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역사 바로알기 차원에서 설명하고 한다. 서명이 서양 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반사적 설명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도장'이 갖는 법적 강제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공문서에 사용된 서명이나 도장은 관원의 서명인 서압(署押)과 관청의 도장인 관인(官印)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관원의 이름을 쓴 착명(着名, 서명)은 공문서에 사용되지 않았다. 즉 조선시대 관원이 관직의 지위를 가지고 공적 업무를 수행하면서 사용한 것은 자신의 이름을 쓰는 착명이 아니라 '일심(一心)'과 같은 독자적인 서명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규정이 변화된 것은 1895년 6월에 제정된 '공문류별급식양'에 의해서이다. 이 법률의 제정으로 서압(署押)이 폐지되고 인장(印章)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공문서에는 세 종류의 인장이 사용되게 되는데, 관청의 명칭을 새긴 '관인(官印)'과 관직명이 새겨져 있는 '관장(官章)' 그리고 관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사인(私印)' 등이 그것이다.

 

공문서에 서명(사인)을 폐지하고 도장을 사용하게 한 규정으로 인해 이후 도장의 사용은 광범위하게 민간의 영역으로 확대되었으며, 개인의 동의를 증명하는 법적 강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왜 갑오개혁 이후 공문서에 인장의 사용을 강제하게 된 것일까? 이 시기 인장 사용을 근대적 요소로 설명하고 있는데. 서명과 인장의 사용 여하가 근대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을까? 적어도 인장의 사용을 근대성으로 이야기하기는 무리스러운 면이 많다. 관원이 자신의 결재방법으로 서명(서압)을 사용하지 않고 관장(관직명 도장)을 사용하게 한 것은 1894년 반포된 '각부각아문통행규칙' 때문이다. 공문서의 생산 유통 시스템이 변화함으로 인하여 서압보다는 관장의 사용이 보편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894년 이후 공문서 생산의 가장 큰 특징의 변화는 '기안문'의 작성이다. 공문서를 보내기에 앞서 결재권자의 결재를 얻기 위해 별도의 문서(기안문)를 작성하고, 이 문서를 토대로 보낼 공문을 작성하여 관인을 찍어 수신처로 보내도록 규정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공문서 작성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기안문-시행문 규정에 새롭게 시행됨에 따라 서압의 효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장의 위조가 쉬워진 환경 속에서 인감을 제외하고는 도장의 법적 강제력이 약화되고 대신 서명이 사용된 것도 어느 일면에서는 서명의 위조가 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도장의 사용을 근대화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홍성덕(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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