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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문서의 향기] 국한문 혼용

공문서 한글 사용 정보공유 확대

1904년에 장예원에서 전라북도 관찰사에 발급한 국한문 혼용의 훈령. ([email protected])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지만, 한글이 공적인 문자로 사용된 것은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뒤이다. '언문으로 사용된 문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법률 규정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조선시대에 공문서에 한글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글이 공문서에 사용된 것은 1894년 7월 '외국의 나라이름과 지명, 인명이 있는 경우 모두 국문(國文)으로 번역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1894년 11월 '공문식' 제14조에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本)을 삼고 한문을 부역(附譯)하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한다.'고 함으로써 법률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908년 1월 25일 각 관청의 공문서류는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지만, 순한문이나 이두 또는 외국문자는 혼용할 수 없다는 규정이 공포되면서, 사실상 공문서의 한글사용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공문서에 사용된 문체로는 외교문서에 사용된 이문(吏文)과 일반 관청문서에 사용된 이두(吏讀)가 있었다. 조선시대 공문서에 순한문만이 사용되지 않고, 신라 설총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이두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었다. 공문서에 사용된 이두는 한자를 한국어 문장구성법에 따라 고치고 토를 다는 것으로, 의미부는 한자를 쓰고, 형태부는 음을 취하여 조사나 어미를 표기하는 것으로 예를 들이 '爲乎( ? )'라 쓰고 '하오며'로 읽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갑오개혁기 공문서에서의 국한문 혼용 규정은 바로 이 이두를 한글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매천 황현과 같이 '일본의 문법을 본받는 것'이라 폄하하는 지식인들도 있었으며, 일본의 식민지통치와 연결지어 '한국어와 일본어의 문법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에 국한문 혼용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용이하게 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한글의 사용은 개항이후 외교권이 한자문화권으로부터 비한자문화권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선택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식민지 지배를 용이하게 한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갑오개혁이 가지는 자주적 근대화의 정신에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신분제 철폐이후 공적 업무의 영역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체제로 변화시킨 것이며, 비활용적인 이두문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근대가 가지는 합리적 실용성이 공문서의 사용문자에 적용된 것이다. 이로써 한문을 알지 못하여도 몇 글자의 한자만을 알고 있으면 공문서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정보공유의 확대, 공문서의 한글사용이 가진 최고의 가치였던 것이다.

 

/홍성덕(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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