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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 판화가 지용출 "시적인 느낌을 찾는것 목판화 매력이죠"

새김 실수땐 되돌릴 수 없어 밑그림 완벽하게 한뒤 작업

판화가 지용출씨가 지난 28일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안봉주([email protected])

판화가 지용출.

 

가난한 미술가들의 삶이 그러하듯 그 역시 아내에게 미안해 아침 일찍 작업실로 나온다.

 

김제시 금구면 선암리 291번지. 질경이가 발목까지 자란 마당을 지나 작업실에 들어서자 한 쪽 벽에 세워져 있는 목판 원본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11월 우진문화공간에서 열린 '곁에 있는 나무'전에 내놓았던 작품들이다. 목판 원본은 종이로 찍어놓았을 때보다 강한 인상을 풍긴다.

 

10장이고 100장이고, 작가는 처음 마음 먹은 만큼만 찍고 나면 칼로 목판 원본을 그어버린다. 그리곤 칼자국이 선명한 목판을 찍어서 보관한다. 다시 찍고 싶을 때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인 셈이다.

 

"안팔려서 처박어놨었는데, 어떤 계기로 다 팔려버리면 더 찍고 싶어지잖아요. 세상에 딱 한 장일 수밖에 없는 일반 회화와 달리 판화는 그런 식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거죠. 그나저나 작가로서 그런 유혹 좀 있어봤으면 좋겠어요."

 

각서까지 쓸 테니 목판 원본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하나 파주는 게 낫죠. 절대 원본을 줄 수는 없어요."

 

▲ 전북판화가협회 회장이시죠? 그런데 전라북도에는 '판화가'라 부를 수 있는 작가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서양화가나 한국화가, 판화가…. 그런 개념은 사람들이 만든거잖아요. 특히 요즘은 다양한 매체들이 합쳐지다 보니 판화가란 말 자체를 잘 쓰지 않습니다. 저도 그냥 화가라고 해요."

 

그래도 그림은 안그리지 않느냐는 말에,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림요? 판화도 그림인데…."

 

'뚝딱' 하고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판화는 파서 보여주기까의 과정이 굉장히 많다고 했다.

 

판화가 지용출씨가 사용하는 도구들. ([email protected])

"일반 유화는 계속 붓질을 하면서 점차 완성해 나가지만, 판화는 한 번 팠을 때 실수하면 되돌릴 수 없어요. 그래서 생각도 많이 하고 밑그림도 완벽하게 그린 후에 절제된 선을 사용해 목판에 옮기는 거죠."

 

▲ 판화야말로 고된 작업이라고 하는데, 손도 많이 다치시겠어요.

 

"손이야 초보자때 다치고, 전문가들은 몸으로 파니까 오히려 허리가 아파요. 손은 좋은 칼 아끼려다 다치죠. 엄마들이 아낀다고 안드는 칼 쓰다가 순간 삐끗해서 다치잖아요. 판화가도 그래요."

 

그가 어딘가를 다녀왔다.

 

"이게 내가 진짜 아끼는 칼이에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할까요? 중요한 부분에다 쓰죠."

 

▲ 판화하면 '검은띠 그림' 부터 떠오르는데, '운동' 좀 하셨나요?

 

"저도 80년대에는 운동 참 많이 했죠. 진짜 작업은 졸업하고 나면서부터? 학교 다닐 때는 맨날 데모만 한 것 같아요. 이데올로기라는 게 참 무서워요.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을 보면 자신이 살아온 것과 다른 불합리한 세계가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운동을 하게 되죠. 저 또한 가난하게 자라서 앞만 보고 살아오다 대학교 들어가서 사회변혁운동에 뛰어들었어요. 그 때는 미술이 나름대로 민중운동으로 성공한 것 같아요. 머리에 띠 두르고 주먹 쥐고 그런 판화가 많았죠."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5남매 중 막내. "그림 하면 굶어죽는다"며 예고 진학을 반대했던 부모님 때문에 공고에 들어갔다. 그는 이 때를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라고 표현했다. 다행히 미술 선생님을 잘 만나 한 달에 50만원씩 하던 미술학원을 공짜로 다니며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6수를 해서 들어간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89학번. 6수할 때는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공장도 다녔다. 그는 "지금도 미싱만 있으면 '오바로꾸'도 할 수 있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 서울에서 내려와 '민족미술인협회'를 창립하셨죠?

 

"우리가 민미협을 만들 때만 해도 송만규 형님을 비롯해 다들 색깔이 있었어요. 옛날에는 투쟁이 진보였는데, 운동권 이후 세대들이 말하는 진보란 개념은 우리와 달랐죠. 그렇다고 한 조직 안에서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갈 수는 없잖아요. 합일점을 찾게 된 것이 지금의 민미협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젊은 친구들이 전시장 미술만 지향하는 게 아니라 다행히 사회 어두운 부분에도 관심을 갖고, 진보라고 생각하는 현장에 항상 있으려고 하니까 그런 것에 만족합니다."

 

40여명이 활동하고 있는 전북민미협. 그는 지난해 이근수씨에게 대표직을 넘겼다. 전북민미협은 대운하 건설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등에 관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 '곁에 있는 나무'전은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가벼워졌다고 할까요? 작품이 꾸준하게 바뀌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제가 필요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집어넣지 않다보니까 정말 삭막하다고 했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이 있어서 다른 것은 잘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적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걸 벗는 작업이 쉽진 않았지만 노력했지요."

 

2001년 부터 2∼3년은 황토종이에 작은 풀이나 꽃을 찍었다. 사람들은 좋아했지만 작품은 장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2004년에는 전주역사를 담아낸 현대판 지도로 '완산을 보다'전을 열었다. 그는 "동양의 문인화나 서양의 추상화는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그림이지만, 우리의 옛 지도는 서민적 정서도 담을 수 있고 보는 재미도 있다"고 말했다.

 

작가들이 굶어가면서 열심히 그림 그렸다고 해서 감동받는 세상이 아니다. 그는 "판화에 대한 개념이 수공적인 의미가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해서 좋다라고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동의했다.

 

"남들 다 하는 그림으로는 팔아먹고 못 살 것 같고, 지용출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목판화가. 동판이나 석판보다 회화적인 면은 부족하지만, 목판화는 아무래도 시적인 느낌이 난다. 그는 다시 지도와 관련된 작업을 생각하고 있다. 전주부성 안을 판화로 재연하는 것. "눈에 보이는 풍경을 화면에 옮기는 것도 좋은 작업이지만 과거 살아왔던 흔적들을 찾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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