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재(본보 경영지원국장 겸 논설위원)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1883∼1946)가 워싱턴 D.C에서 어느 친구와 함께 호텔에 묶었는데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친구가 손을 닦고 수건 한장을 쓰고 버리자, 케인즈는 손을 닦은 뒤 수건을 두세장이나 쓰면서 "내가 이렇게 버려야 고용이 증대되고 불경기가 극복될 것"이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불경기 때에는 소비를 많이 해야 경기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동성은 풍부한데 돈이 돌지 않는 우리 경제의 현 상황을 빗댄다면 아주 적절한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곳곳에서 경제가 어렵다고 푸념하지만 돈은 넘쳐나고 있다. 지난 4월의 '통화 및 유동성 지표'를 얼마전 한국은행이 발표했는데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4.9%나 증가했다. 이 증가율은 1996년 6월(16.1%) 이후 8년10개월 만에 최고치다.
시중 통화량이 이렇게 넘쳐난다면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고, 그렇게 된다면 경기침체하의 인플레이션이 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앞으로의 경제 역시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리의 마음을 또 어둡게 하고 있다. 지난 5월 소비자 기대지수는 전달보다 8.2포인트 하락한 92.2였다. 지수가 100 아래면 6개월 뒤 경제를 비관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의미다. 이 수치로만 본다면 3년전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며, 지수 하락폭도 7년6개월만에 최대다.
소비자들 사이에 이런 반응이 나온 것은 현재 살림살이가 그만큼 팍팍하다는 반증이다. 기름값과 물가상승으로 서민들 주머니 사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소비심리마저 얼어붙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경제사정이 어려워질수록 가장 먼저 고통을 당하는 건 서민층이라는 사실이다. 부자들은 끄떡 없다. 각종 임대 수입에다 금융이자 소득, 부동산 투자이익 등 다양한 장치가 떠받쳐 주고 있는 그들에겐 오히려 상대적 포만감마저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세한 자영업자, 일용직 노동자, 생계형 운전자,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직장인들의 민생이 문제다. 통계수치 말고도 현장은 더 심각하다.
어느 개인택시 운전사는 하루 12시간 일하고도 이것저것 다 떼고 난 뒤 순수하게 버는 돈은 2만원 남짓이라고 하소연한다. 과일 값은 30%나 내렸는데도 소비는 오히려 줄었다. 음식점도 손님이 없다고 울상이다.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잡기가 어려웠던 오리고기집, 닭고기집도 썰렁하다. 그놈의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이다. 지레 겁먹고 소비자들이 발길을 돌린 탓이다. 쇠고기집도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덩달아 손님이 떨어졌다. 의류· 유통· 운수업종 모두가 고통을 겪고 있다.
경제가 어려운 건 대외적인 요인이 크지만 정치환경이나 국민들의 심리적 요인도 크게 작용한다. 결국은 리더십의 문제일 것이다. 경제를 몰랐던 대통령도 민생문제가 불거지면 국민눈높이 대책을 마련하고 불안심리를 다독거렸다. 그러나 경제대통령을 자임했던 이 정부는 그런 모습마저 보여주지 못했다.
이젠 사람도 바꾸고 새출발하는 심정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했으니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민생경제를 추스렸으면 한다.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장이면 족할 손수권을 두세장 썼던 케인즈의 심정으로.
/이경재(본보 경영지원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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