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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화의 발견] ①왕기석 명창 '용마골 장사'

연습시간 늦어 '만덕' 역 박탈…"최선 다하는 모습이 중요" 소리꾼으로 만든 작품

지난달 25일 최명희문학관에서 만난 왕기석 명창. 이강민([email protected])

예술가들에게 데뷔작은 사랑과도 같다.

 

고백하지 못한 짝사랑처럼 아쉽고, 실연의 상처처럼 생각만으로도 낯이 붉어지기도 한다. 데뷔작 하나로 일약 스타가 되기도 하지만 남들 기억 속에는 스쳐지나가는 작은 것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예술가들에게 데뷔작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랑이다.

 

위부터 천명, 흥보전, 용마골장사. ([email protected])

어느덧 중진으로 자리잡은 이들. 그들에게도 데뷔작은 있었으리라.

 

지금을 만든 그 때 그 작품 '나의 데뷔작'. 문화전문기자들이 직접 그들의 데뷔작을 만난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창극배우 왕기석 명창(45·국립창극단 지도위원). 그는 1980년 국립창극단 연수단원으로 시작해 29년 동안 1백여 편이 넘는 창극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신세대 창극인'과 '국립창극단의 차세대 주자'를 넘어 지금은 '한국 창극의 간판스타'이며, '영화배우 최무룡 이후 주인공을 가장 많이 따낸 배우'다.

 

형형한 구름으로 가득하던 지난 달 25일 전주 최명희문학관에서 그를 만났다.

 

왕기석 명창이 처음 주역을 맡은 작품은 1986년 국립극장 대극장에 오른 창작창극 '용마골 장사'(작·연출 허규)다. 몽고군에 대항해 싸우는 고려의 장수이자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기장수 '만덕'이 그의 역할. 4·50대 춘향이와 이도령을 당연하게 여기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스물넷 청년 소리꾼에게 주인공을 맡긴 일은 파격이었다.

 

광대가. ([email protected])

"그래서 더 어렵고 조심스러웠지요. 하나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고, 섣부르게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5관(청)으로 질러대라고 하면 기를 쓰고 해야 했고, 5장에서 불렀던 노래는 강원도 산타령 하시는 분을 어렵게 찾아가서, 굉장히 어렵게 배우기도 했죠."

 

작품이 끝난 뒤 그는 남자소리꾼이 턱없이 부족한 국악계에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이몽룡·심봉사·놀부 등 다섯 바탕의 알짜배역을 도맡았으며, 신재효·김구·안중근·이순신 등 창작창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종민 교수(동국대 국악과)가 이 작품에 대한 소평에서 '무엇보다 연소(年少)한 왕기석이 처음으로 창작창극의 주연인 용마골장사 역을 맡았는데 무난히 소리와 연기를 소화해 내어서 좋은 평을 받았다'고 기록할 만큼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낸 탓이다.

 

'용마골 장사'는 소리꾼 왕기석을 창극계 대표 배우로 각인시킨 작품이지만, 그가 이 작품을 자신의 데뷔작으로 꼽는 이유는 따로 있다. 봄과 가을, 총 세 차례의 공연 중 그는 두 번째 공연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지 못했다. 연습시간에 늦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어찌 보면 사소한 일 일수도 있지만, 허규 연출은 그에게서 '만덕'의 역할을 박탈했다. 공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주인공을 바꾼 것 역시 '파격'이었다.

 

"마음이 찢어졌지요. 사표도 썼다 버리고, 썼다 버리고 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내 장래를 위해, 저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그러신 것 같아요. 사실 어린 나이에 주인공을 맡았고 평도 좋았기 때문에 자칫 우쭐해지고 건방져질 수도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프고 나니까, 오히려 몸가짐이 더 조심스러워지더라고요.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는 저를 보고, 창극단 여러 선생님들이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거든요."

 

자성(自省). 그래서 그에게 '용마골 장사'는 첫 주연 작품이라는 의미보다, 배우이자 소리꾼으로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했던 도반(道伴)이다. 왕기석이란 걸쭉한 창극 배우와 어려움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성찰이 몸에 깃든 한 소리꾼을 만든 작품인 것이다.

 

"소리는 기능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느끼고 체험했던 삶의 다양한 밑그림들이 소리의 바탕이 되는 겁니다.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쌓이고, 삭이고, 풀어져야, 혼이 담긴 소리를 담을 수 있을 테니까요."

 

탄탄한 성음과 구성지고 힘찬 너름새, 무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 선이 굵은 연기, 매번 다양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순발력. 그는 어떤 무대에서든 풍성한 추임새를 얻었고, 특히 창작극 '천명'에서 전봉준으로 열연한 뒤에는 '창극단 최고의 광대'란 찬사도 받았다. 새로운 배역이 맡겨질 때마다 그는 늘 새롭게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뼈아픈 사건은 고향인 정읍(옹동면 산성리 소칠마을)에서 가난으로 인한 쓸쓸한 추억과 서울로 상경해 안 해본 일 없이 고생하며 검정고시를 마쳤던 사연들, 대사 한 마디 없던 1980년대 초 연수단원 시절, 라면 하나를 세 조각으로 나눠서 먹었던 일들, 국립창극단의 정식 단원이 된 1983년 '춘향전' 군로사령 역할로 처음 대사 한마디를 했던 기억들과 더불어 그의 소리세계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그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심봉사'와 '놀부' 역할이 가장 매력 있다"고 말한다. 특히 심봉사 역할을 좋아하는데, 질펀한 삶, 놀 때 놀고 슬플 때 슬픈, 인간사 그대로의 캐릭터를 살릴 수 있어서다. 흥부는 안 해봤다. 사실 못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우렁찬 흥부는 아직 창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내 '이몽룡'만 도맡다가 올해 처음 '변학도'를 해보기도 했다. 기존 이미지의 변화를 시도해봤지만,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단다.

 

"더 이상 배역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꼭 하고 싶다면 작품의 감초와 같은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는 역할, 대사가 없어도 무대에서 같이 즐길 수 있는 역할입니다. 물론 저는 배우로 남고 싶어요. 기회가 주어지면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지만, 결국은 평단원으로 돌아가서 늘 무대에 서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득음(得音)을 물었다.

 

"세월이 흐른다고 득음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득음은 하늘에서 내리는 소리니까. 사실 평생을 다 해도 소리다운 소리 한 자락 펼쳐내지 못하는 소리꾼이 더 많습니다. 우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소리는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리꾼이 진실로 다가가면, 청중은 추임새로 맞아주시잖아요."

 

우리 소리의 숨결을 실하게 다듬고 있는 왕기석 명창. 전주와 정읍, 전라도는 그가 자랑스럽다.

 

/최기우(극작가·전북일보 문화전문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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