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가리켜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노래한 사람은 일본의 천재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다. 유난히 예민한데다가 퇴폐적이었던 그는 마흔 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투신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가을은 '초토'(焦土)이며 그래서 '무참하다'라고도 그는 썼다. 여름이 '샹들리에'라고 한다면 가을은 '등롱'(燈籠)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 사람이다. 언젠가 작은 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기다리다가 탁자 위에 놓인 사진을 통해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 한 여자가 지친 듯 앉아있는 것을 들여다 보고나서 그는 또한 이렇게 썼다.
'나는 가슴이 타서 재가 되는 것 같이 처참한 그 여자를 그리워했다. 사나운 정욕까지 느꼈다. 비참한 것과 정욕은 등과 배 같은 것인 모양이다. 숨이 멎을 듯이 괴로웠었다. 황폐한 벌판에서 코스모스를 만나면 나는 또 그것과 똑같은 고독을 느낀다'
가을이 주는 감성적 칼날이 이보다 더 날카롭게 드러난 표현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고보면 '잎새에 이는 바람소리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윤동주의 감수성도 깊은 가을 한 가운데에서 느끼는 존재에 대한 고통스러운 연민에 닿아 있었던 모양이다.
여름은 연민을 느낄 겨를이 없다.
일광은 타오르고 녹음은 무섭게 뻗어나가고 사람들은 전투적으로 걷는다. 문을 있는대로 열어젖혀야 하고 우두자국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게 여름이다. 한낮의 시간처럼 모든 것이 아낌없이 열리고 불타오르니 우리들의 영혼은 작열하는 일광 밑에서 숨을 곳이 없다. 혼자 있으면서도 고독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달려가면서도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소리치면서도 그 소리의 메아리가 무엇을 울리고 되돌아오는지 가려보지 못한다. 영혼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지고 내면의 뜰은 횡경막에 눌려 비지땀을 흘릴 뿐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라.
낮에는 햇빛이 아직 뜨겁지만, 저물녘이 오면 어느새 풀벌레가 울고 소슬한 바람이 분다. 흰옷을 찾아입고 창문을 하나씩 닫는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 소스라쳐 돌아보면 당신은 '혼자' 창가를 서성거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뼛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정말로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계절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모두 떼어버려야겠다'
선구적이었으나 고독하게 살았던 전혜린(田惠麟)의 문장이다. 가을이 주는 첫 번째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혼자'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 이제 머지않아 나뭇잎은 물들고 들녘의 곡식은 익고 하늘은 끝간데 없이 높아질 것이다. 그때가 돼도 천지간에 당신이 한 존재로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에겐 아직 가을이 오지 않은 셈이 된다. 그것은 곧 성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난 여름에 나는 어디에 있었던가.
성숙한 가을에 '혼자'인 것을 깨닫고 나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서 솟아날 수밖에 없다. '촛불'과 '올림픽'과 '고소영'같은 낱말들이 여름 복판을 관통하고 있는게 보일 것이다. 성숙을 통해 혼자가 된다는 것을 과거를 깊은 성찰로 뒤돌아본다는 것이고 동시에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뚜렷이 인식하고 포기할 수 없는 본원적인 꿈으로 앞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가을은 그런 힘이 있다. 외부로 열린 문을 닫으면 내면의 뜰이 넓어지는게 인지상정이다. 잎새를 흔들고 가는 바람 소리가 가슴에 사무치고 오래 전 헤어진 첫사랑의 그림자가 불현듯 나를 덮칠 때, 그리하여 숨가쁘게 달려오느라 미처 보지못한 내 삶의 물집들이 눈물겹게 시선 속으로 들어올 때, 바로 그런 가을에 이야말로, 마실나갔던 본성이 내 영혼 속으로 되돌아와 나를 깨우는 축복의 시간이다.
가을 깊어지면 그러하니, '혼자'가 되자. 그리고 자신에게 묻자. "괜찮은가. 내 삶이 지금 이대로…좋은가"
/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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