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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화의 발견] ⑦연극인 전춘근씨

흔들림 없이 '버텼던' 전북연극 큰언니, 한해도 쉬지 않고 작품 활동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일'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연극 내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시간 죽이기'를 한다. 연극인 전춘근씨(45)의 연극 인생도 사실은 그렇게 시작됐다.

 

"연극인들이 궁금했어. 대학도 그만뒀으니까, 시간이 너무 많은데 할 일은 없었거든. 배우모집 포스터를 우연히 봤는데 마감이 하루 남은거야,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더라고. 연극이 뭔지도 몰랐는데…."

 

그 때 함께 시험 봤던 12명은 모두 합격했다. 그러나 9명은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했다. 그의 동기 중 현재까지 무대에 서고 있는 사람은 이부열씨(54·전북배우협회장) 한 명 뿐이다.

 

"배우는 끼가 아니야. 끼가 많으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지. 그래서 버티질 못해. 차라리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야 오래가는 것 같아."

 

아직도 연극은 "버티는 것"이지만, 그때는 더 심했다. 당시 시립극단 배우 월급은 정단원 3만원, 준단원 2만원이 전부. 그래도 1985년은 양신욱 박창욱 박미선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짱짱하게' 무대를 지키던 때였다.

 

지금은 첫 손에 꼽히는 연기파 배우지만, 처음부터 그에게 비상한 연기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처음 인연 맺은 작품은 마당놀이 형태의 '대춘향전'(1985, 전주시립극단). 배우로 입단했지만, 그는 이 작품에서 소품제작과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스태프였다.

 

"작은 소품들 만들고, 배우들 옷 챙기고, 라면 끓여주고, 심부름 했어. 잘하는 여자 선배들이 많아서 돌아올 배역도 없었고."

 

 

처음 무대에 선 작품은 '까스띠아의 연인들'(1985, 전주시립극단)이다. '시녀3'으로 출연한 그의 대사는 "네."와 "네에~." 단 두 마디. 그래도 쉽지 않았던 '네~ 페레이드'. 그때는 무대에서 발걸음 옮기는 것도 어려웠다. 체질이 아닌가, 극단을 그만두고 신학을 전공하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때 한전 다니던 친구가 그러더라고. 인생에서 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한 우물을 파야 한다…."

 

한 우물을 파라. 이직(移職)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쉽게 던질 수 있는 관용어이기도 하지만, '짱짱한 직장'에 다니던 친구의 충고는 그에게 큰 힘이 됐다. '그래. 해 보자, 까짓.' 순진한 춘근씨….

 

연극이 재밌어진 것은 양혜숙씨가 창단한 허수아비인형극단과의 만남 덕분이었다.

 

"원래는 오프닝멘트만 시키려고 했다는데, 배우가 없으니까, 나까지 기회가 왔지. 그때 선배들은 인형극하는 거 좋아라 하지 않았거든. '개' 역할 맡았어. 내 손으로 인형의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옮기면서 배우가 뭔지, 연기가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

 

인형극을 통해 그는 "연극이 진짜 재미있어"졌다. 연극은 할 만한 것이었고, 노력해 볼만한 것이었다. 연극 이외에는 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친 김에 인형극을 함께 한 배우들끼리 성인연극도 준비했다. 그가 '데뷔작'으로 꼽는 '고도를 기다리며'(1987, 창작극회)다.

 

"많이 배웠어. 무대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부터 다시 알게 됐으니까. 혼도 많이 났고, 칭찬도 많이 받았고. 이 작품을 통해서 연극이 무엇인지 배웠다고 해야 할까? '연극을 하리라' 마음먹게 했던 작품이지."

 

사실 필자가 그의 데뷔작으로 예상했던 작품은 '초짜배우'에게 전국연극제 연기상 수상의 영예를 안긴 '단야'(1987, 창작극회)였다. 그러나 그 '대단한 수상'은 그를 더 난처하게 만들었다. "연기상을 받은 후 10년 동안 무관의 설움"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다음해 선배들 대부분이 무대를 떠났기 때문이다. 스물다섯 살이던 '2년차 신인배우'는 그때부터 전북의 최고령 여배우가 되었다.

 

20년 넘게 전북연극의 맏언니인 그가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겁내지 말고 달려들어라"와 "연극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화와 상생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해라"이다.

 

"배우는 가장 나다운 모습을 보일 때 관객과 진실이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해. 만들어진 것을 입는 것이 아니라, 배우 자신의 모습이 담길 수 있도록 해야 해. 그래서 배우가 아니라 연극인이어야 하는 거지. 좁은 의미로 말하면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고, 넓게 말하면 배우 스스로 자신에 대한 책임을 갖자는 말이야."

 

작품 속 인물을 그대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몸에 맞는 인물을 만들어 내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야. 이제 불혹이라는 의미를 조금씩 알 것 같기도 해. 40대는 참 좋은 나이야. 50대가 되면 지천명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 흔들리지 않고, 잘 여문 인생이 돼야지. 그래야 그 모습이 담긴 연기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의 특별한 연기는 연극을 시작한 이후 단 한 해도 작품을 쉬지 않았던 열정에서 나온다. 인생이 깊으니, 무대도 깊다.

 

/최기우(문화전문객원기자·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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