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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화의 발견] ⑧연출가 오진욱씨

늘 진땅 위에서 땀 흘리는 농부같은 사람

흔히 진땅 마른땅을 인생에 비유할 때 사람들은 진땅을 고생만 지질이 한다는 의미로 안 좋게 사용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길을 걷는 사람 입장에서만 비유한 거다. 잘 다진 마른땅은 사람이 걷기에는 좋은 땅일지 모르나 생명의 씨앗은 싹 틔질 못하는 죽은 땅이다. 진땅에서 벼이삭이 돋고 쑥부쟁이 꽃도 핀다. 농부는 평생을 그 진땅 위에서 땀을 흘린다. 예술계 입장에서 볼 때 오진욱씨(42)는 농부와 같은 사람이다.

 

"돌이켜보면 난 항상 진땅에서 질퍽거렸던 것 같아요. 지역예술 판에 있는 사람들치고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저는 유독 여러 여건이 좋지 않을 때 판을 벌였던 적이 많아요."

 

시작은 1985년 우석대학교 대학연극단 '무제'에서 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극을 한 것은 창작극회에서였다. 당시 창작극회는 전주KBS방송국 밑에 있었는데 작고한 연극인 신상만씨가 운영하고 있었다. 쟁쟁한 선배 연극인들이 있었던 창작극회는 신출내기 오씨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그 길로 학교를 휴학하고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하였던 1989년에는 대학연극제에 나가서 연출상, 연기상 등 거의 전 부문을 휩쓸었다. 지금까지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라고 한다.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 90년대 초반에 찾아온다. 학교연극만으로는 여전히 '배가 고팠던' 그는 창작극회가 지금의 풍남동으로 옮길 때 완전히 전업연극인으로 삶의 기반을 옮긴다. '정말 배고픈' 생활로 들어선 것이다.

 

"그때는 다들 정말 어렵게 생활했어요. 돈이 없으니 그냥 몸으로 때운 거지요. 생 노가다 품을 팔아서 소극장으로 만들었어요. 해머로 콘크리트 벽을 부쉈던 게 바로 접니다."

 

그 후로 몇 년을 정말 연극만 하고 살았다. 전주시립극단과 창작소극장에 걸렸던 거의 모든 연극에 출연하였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먹고 살기는 힘들고 사회적으로 인정도 못 받는 연극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극단 단원들은 하나 둘씩 떠났다. 결국 홍석찬씨(창작극회 대표)와 단 둘만 남았다.

 

2006년 작품 '춘향, 네 개의 꿈' ([email protected])

 

"힘들어도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연극인은 연극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사람들이 주저하니까 좋은 작품을 걸으면 돈도 벌 수 있다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17명을 모았습니다."

 

사람들을 모으고 작품도 '콩쥐팥쥐'로 정했다. 그런데 연출할 사람이 없어 얼떨결에 연출을 맡게 되었다. 연극생활 10년도 안 된 사람이 연출을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오씨의 처녀작이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우진문화공간과 시립예술회관으로 순회했던 공연의 객석은 계단까지 메울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공연의 성공과 함께 때마침 전주시립극단이 비상근에서 상근체제로 전환을 했다. 사람들이 다시 연극판으로 몰려들었다.

 

"어려울 때는 떠나더니 조금 풀리니까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실망도 했어요. 하지만 이것이 연극판을 떠나기로 마음먹게 된 주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1991년에 했던 '방디기뎐'이 계기가 되었지요."

 

'방디기뎐'은 판소리를 이용한 2인 연극이었는데 색다른 형식과 주인공들의 열연으로 인해 당시 전북권 최고의 히트작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와 임효선씨는 전북의 대표적인 연극배우로 발돋움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우리 소리를 배웠는데 소리를 알면 알수록 양이 안 차고 자신의 공연이 부끄러웠다. 더구나 그는 평소에도 국악과 관현악, 연극 형식을 결합시킨 공연을 만들고 싶었던 터였다. 그래서 월사금을 싸들고 판소리명인 이일주 선생을 찾아갔다. 그렇게 국악을 익히고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에 들어갔다.

 

창극단 배우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항상 연극판이 그리웠다. 결국 곽병창 우석대 교수와 함께 있는 돈을 다 털어 연습실을 마련하고 연극판에 복귀게 된다. 그러나 생활은 극히 어려워졌다. 처자식까지 생겼는데 한 달 수입은 채 5만원이 되지 못했다. 모아 놓은 퇴직금도 쥐 쏠은 곳간 쌀처럼 사라졌다. 생활하기 위해서 방송국 진행자로 나섰지만 배우의 삶을 놓지는 않았다.

 

이때 인생에 있어 제2의 전환점이 되었던 2001년 '춘향전' 평양공연이 찾아왔다. 사회주의사회인 이북의 집체공연은 규모나 질에 있어서 오씨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서 공연했다. 공연이 끝난 후 호텔 로비로 나왔을 때, 이북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기립박수를 쳐줬다. 그는 화장실에 가서 그저 엉엉 울었다. 그간의 서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우로서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꿈꿔오던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몇 번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던 남원시립국악단 상임연출 자리를 수락했다. 연출가 오진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창극을 또는 퓨전적인 연극을 연출함으로써 공연계에 신선한 충격과 바람을 몰고 왔던 그에게 모든 작품은 소중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배우로서 등용문이 되었던 '방디기뎐'과 연출가로서 처녀작인 '콩쥐팥쥐', 그리고 고전 춘향전을 새롭게 해석한 3시간짜리 대작 '춘향, 네 개의 꿈'(2006)은 잊지 못할 작품이다.

 

그는 공연을 준비할 때는 독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다. 그가 요구하는 배우는 단순한 배우가 아니다. 소리꾼이자 연주자이면서 배우의 역할을 해야 하는 전인적인 예술인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 참여하는 예술인들은 고달프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스트레스와 고통을 많이 받는 사람은 그렇게 요구하는 그 자신이다. 공연 하나를 끝낼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아내와 딸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는 건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들이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미안하고 고맙다.

 

/이경진(문화전문객원기자)

 

이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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