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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 (18)클래식 기타리스트 김문성씨

"많이 알아주지 않아도 평생 연주자 길 가야죠"

클래식 기타리스트 김문성씨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최선범([email protected])

손톱끝으로 현을 튕길 때 애잔한 소리가 공명한다. 찰나에서 영원을 꿈꾼다.

 

'역사'가 되기엔 너무 짧은 '순간'이다. 그래서 클래식 무대에서 기타연주가는 주목받지 못했다.

 

가난한 도시에서 기타리스트로 산다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김문성씨(42)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타와 '지기(知己)'한 지 30년이 된 클래식 기타연주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누나가 옷장 위에 모셔둔 기타를 몰래 꺼낸 게 발단이었다.

 

묵직하게 저음을 울어댔다가, 가만히 자신을 감싸주는 따뜻한 음색이 좋았다.

 

정체 불명의 외로움을 기타로부터 위안받았던 것.

 

기타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은 대학 입시에 미끄러지면서부터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6개월만에 마친 뒤, 서울시립대를 지원했다.

 

대학에서 기타 전공생을 딱 1명 뽑는 유일한 곳이었다. 실력 차이를 절감했다.

 

기타를 연주한 뒤 밤새도록 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자신을 이끌어 줄 선생을 찾아다녔다. 텅빈 속을 되새김질 하는 그에게 문풍인 평택대 교수는 제 길 찾아가도록 팔분음표를 찍어준 은인. 인연이 고리가 되어 이듬해 평택대로 진학, 스페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유학 길에 오르는 후배들의 관심사는 대개가 강사나 교수 자리입니다. 평생 연주자의 길을 가겠다는 꿈은 쉽게 접어요. 속상합니다. 작은 무대건 큰 무대건 가리지 않고 묵묵히 연주자의 길을 가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학교 문턱을 열심히 밟아본 적은 없었지만, 스페인은 그를 반겼다. 들어갈 때도, 마칠 때도 수석을 했다. 하지만 1995년 건강상의 이유로 귀국해 부모님이 계신 전주로 돌아왔다.

 

클래식 무대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속상함.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높은 현실의 벽.

 

그래도 기타 연주는 포기할 수 없었다. 문화센터, 학원 강사로 밤낮없이 뛰었다. 운도 따라줬다. 실력있는 수강생들이 몰렸고, 학원 운영은 승승장구를 달렸다. 하지만 혼자서 속 빈 울음을 울었다. 전업 연주가를 꿈꾸는 이의 하얀 공백이다.

 

그는 기타연주가로서의 삶은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말한다. 작지만 담을 수 있는 자신만의 그릇은 있다고 믿기 때문.

 

16년 째 클래식연주가모임인 '전북음악연구회' 기타연주자로 활동 해오다 올해부터 회장을 맡았다. 4년 전부터 '듀오 솔리스트'를 창단해 연주회도 열어왔다. 작은 무대에 더 잘 어울리는 기타,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와 함께 꾸린 것. 모든 편곡은 아내이자 작곡가 송주란씨 몫이다.

 

지인들은 그의 연주를 '뭉실뭉실하다'고도 하고 마음의 어둠을 다독이듯 촉촉하게 감싼다고도 한다.

 

모두가 깊은 잠에 취한 밤. 외로움을 이겨내며 오랜기간 연습해왔던 공력이다. 현을 매만지면 기타와 그의 어제와 오늘이 하나가 된다. 그가 바로 기타다.

 

그는 스페인마드리드왕립음악원에서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Marisol, Jose Luis Rodrigo에게 사사하고, 피아니스트 Anibal Banados에게 앙상블과 미학, 미술사 등을 사사했다. 1996년부터 현재까지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등 전국 순회 연주회, 25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독주회를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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