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혹은 성벽을 기준으로 동서 폭 240m, 남북 길이 490m에 이르는 거대한 익산 왕궁리 유적(왕궁성)은 정말로 백제 무왕이 사비 도성을 대체, 혹은 보완하려고 축조한 신궁(新宮)이거나 또 다른 왕궁이었을까? 삼국사기는 왕궁성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나, 삼국유사와 일본에 전하는 중국 남북조시대 불교 관련 기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서는 무왕(武王.재위 600-641)이 이곳에다 새로운 궁성을 조성하고 아예 이곳으로 도읍까지옮겼다고 기록한다. 이런 기록의 사실성 여부를 점검하고, 왕궁리 유적 전체의 실체를 해명하기 위해 이 일대를 연차 발굴 중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가 올해 조사에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결정적인 흔적을 찾아냈다. 연구소는 올해 왕궁성 남쪽과 동쪽 담 안팎 일대를 정밀 발굴조사한 결과, 궁성을 축조하기 위해 대규모로 대지를 조성한 흔적과 치밀하게 축조한 성벽 양상을 확인했으며 성벽 축조기법을 복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를 확보했다고 5일 말했다.
조사 결과 궁성 내부 남동쪽 일대에서 동서 약 120m, 남북 160m 범위에 걸쳐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 대지를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인 성토층(盛土層)이 드러났다.
흙을 쌓은 두께는 현재의 지표면을 기준으로 동벽 문터 주변이 약 5m, 동벽 내측 일대가 최대 7m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궁성 축조 이전에는 울퉁불퉁했을 대지를 편평하게 만들기 위해 튀어나온 부분은 깎아낸 반면, 움푹 들어간 대지는 흙을 채웠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왕궁성이 만들어지기 이전 지형을 파악하고 복원할 수 있게 됐으며, 나아가 이런 공사에 동원된 인력 규모라든가 토목기술의 실체를 구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심영섭 소장은 말했다. 나아가 연구소는 성벽 조사를 통해 그 구조와 구간에 따른 축조 기법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성벽은 몸통이라 할 수 있는 체성부(體城部)를 중심으로 그 지하에는 폭 3m 안팎에 이르는 기초시설을 별도로 했으며, 성벽 안팎에는 폭 0.9-1m 가량 되는 보도 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구조물들을 모두 합칠 때 성벽 전체 폭은 10m에 이르는 장중한 형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또 왕궁성 담이 대체로 흙과 돌을 섞어 쌓은 토석혼축(土石混築) 구조임에 비해남벽과 동벽이 만나는 모서리 지점에서는 흙으로만 쌓은 토축 구조(土築構造)로 밝혀짐으로써 성벽은 "구간별로 사용한 재료나 크기, 그리고 축조수법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이에 따라 일정 구간씩 분담해 책임 시공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이 외에도 올해 조사에서는 동쪽 담 바깥에서 하천으로부터 성벽을 보호할 수 있는 외곽시설도 확인됐다. 결국 이와 같은 조사 성과는 왕궁리 유적이 국가의 대규모 공력을 들여 치밀하고, 장중하게 조성한 '궁성'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