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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사람] '시계 할아버지' 전주 서병윤씨

"멈추지 않는 바늘의 합창, 그 생동감이 좋아요"

혹시, 시간 흘러가는 소리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간 흘러가는 소리는 꼭 시냇물 소리 같아서 '시곗물 소리'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20평, 도심 속 작은 아파트 안으로 수 백 개가 넘는 시계가 잘도 흘러갑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계왕국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도 시계, 저기도 시계, 이 방도 시계, 저 방도 시계….

 

전주시 평화동 서병윤 할아버지(85)의 집은 온통 시계다. 그것도 바늘이 있는 아날로그 시계 천지. 전자시계도 좋지만, 왠지 죽어있는 것 같아 살아움직이는 바늘시계가 좋다.

 

한 쪽 벽면에는 정각이 되면 소리를 내는 뻐꾸기 시계만 빼곡하게 걸려 있다. 원목인 데다 모양도 비슷해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뻐꾸기 시계들을 할아버지는 마음 내키는 대로 물감으로 화려한 색을 입혀 놓았다.

 

반대편 벽에는 할아버지가 시간을 확인할 때 보는 원형 바늘시계가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우선 크기가 커서 눈이 침침한 할아버지에게는 딱이다. 그 바로 아래 선반에는 다양한 모양의 알람시계가 진열돼 있다.

 

약 800여개. 웬만한 시계방보다도 많은 시계들이 한 번 울리기 시작하면, 정말, 집이 떠내려갈 듯 하다.

 

"나 혼자 이렇게 조용히 앉아있으면 시계 돌아가는 소리밖에 안들려요. 안사람은 싫다고 하는데, 나는 이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거실 입구, 달력 뒷면에 직접 써서 붙인 '시계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란 인사말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작은방 한켠에 놓여있던 커다란 괘종시계. 시작은 이 시계때문이었다.

 

"한 6년 쯤 됐나? 큰 시계가 길가에 버려져 있는 거예요. 저런 거 하나 사려면 7∼8만원, 많게는 10만원 이상 들텐데…. 모양새도 깨끗해서 주워다 분해하기 시작했죠. 한번도 그런 걸 해 본 적은 없었는데, 내 손으로 시계를 고칠 수 있게 되니까 자신감까지 생기더라고요."

 

버려진 시계를 주워다 고치는 일에 재미가 붙었다. '시계박사'란 별명에, 손재주가 좋다는 말도 자주 듣지만, 그럴 때면 할아버지는 "나이 먹어서 할 일도 없고, 집중만 하면 누구든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웃곤 한다.

 

"속을 고칠 수 있게 되니까 얼굴도 예쁘게 바꿔보고 싶더라고요. 이건 얼굴이 너무 검어서 시간이 잘 안보여요. 그래서 내가 숫자를 오려붙였어요. 이 뻐꾸기 시계들은 원래 칙칙했는데 산뜻하게 색칠했지요. 이건 회전하는 판에다가 세계 각국의 시계를 붙여놨는데, 한국 미국 불란서 영국 이태리 태국 일본 호주…."

 

시계 설명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할아버지. 그러나 수백개의 시계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미국 현재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였다. 달력 뒷면에 달력의 숫자를 오려붙여 만든 시계. 할아버지는 "우리 딸이 미국에 살고 있다"며 "이 시계를 보면서 딸이 뭐하고 있을 지를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했다.

 

"내가 뭐 하나 읊어볼까요? '그는 쓰레기더미 속에서 발굴되었다. 작업대 위에서 분해해 재조립하여 전원을 삽입하여 그는 재생되었다. (…) 오 나의 자랑이여! 오 나의 기쁨이여!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영원하리라'. 내가 지었어요. 제목은 '시계예찬'입니다."

 

그러나 이런 할아버지에게도 시계와 관련된 상처가 있었다.

 

"사람들이 자꾸 교회에 나오라잖아요. 나이도 들고 다녀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하루는 신방이라는 걸 와서는 "당신 죽으면 시계들 전부 돈 내고 버려야 하는데, 뭐하러 이런 걸 하냐"고 한심한 듯 말하더군요. 그 때 너무 속상해서 "나 이제 교회 안다닐 테니까 당신들도 다시는 우리집 오지 말라"고 했어요."

 

할아버지의 시계 사랑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내 박화숙씨 뿐(75). 아내와는 '이 놈의 시계'때문에 한동안 신경전이 심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집안 구석구석에 주워온 시계를 찔러놓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숨겨둔 시계들을 찾아내 마대자루에 담아 몰래 버리는 일을 반복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안방에는 전자시계 하나만 걸기로 양보하고, 할머니는 아침밥만 먹고 나면 경로당에서 놀다오기로 '약속 아닌 약속'을 해버렸다.

 

"안사람은 정신 사납다고 싫어하니까, 아침밥만 먹고나면 내가 그래요. "당신, 오늘 뭔 일 없어? 당신도 볼 일 있으면 나가지 그래?"라면서 경로당으로 보내죠."

 

한 달이면 시계 건전지 값만 7∼8만원. '시계 할아버지'로 소문이 나면서 가끔 구경오는 사람들도 있다. 간혹 시계를 사겠다는 사람에게는 건전지값이나 할까하는 생각으로 5000원씩 받고 팔기도 하지만, 대부분 시계를 마음에 들어하는 손님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선물한다.

 

"요즘에는 폐기장에서도 왜 시계 가지러 안오냐고들 하는데, 관리도 중요하잖아요. 하루에도 몇개씩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고 하는데, 그러면 약도 갈아줘야 하고, 할 일이 많아요. 나는 바늘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게 좋을 뿐이에요. 살아서 움직이는 거잖아요.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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