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재(본보 경영지원국장 겸 논설위원)
어느 새 세밑이다.
희망을 안고 힘차게 발진했던 올 한해가 어이없게도 낙망과 고통을 안기며 저물고 있다. 불과 1년전만 해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 경제 하나 만큼은 확실히 살릴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 희망이 이젠 절망으로 바뀌어 버렸다. 고·소·영 인사와 부자정책으로 시끄럽더니 금융위기 한방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인프라가 취약한 우리나라에 연일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환율과 주식시장은 외국자본에 휘둘리며 춤추고 있다. 내공이 약한 기업, 변화에 둔감한 가계, 자영업자 모두 죽을 맛이다.
농담도 현실이 됐다. "뻔드(펀드) 뻔드! 외치다 패가망신할 것"이라던 그 우스갯 펀드는 반토막 났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쪼개 큰 맘 먹고 투자했던 서민들은 가슴만 쥐어박고 있다. 고귀한 생명을 자살로 몰아가는 펀드, 그 무서움도 알게 됐다.
이제 막 시작일 뿐, 내년이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험악한 예측이 서민들의 가슴을 짓누른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전이되면 감량경영과 부도, 구조조정과 실업, 자금의 동맥경화 등 혹독한 시련이 닥칠 것이다. 그건 경제적 약자와 서민의 고통이 그만큼 커진다는 뜻이다.
회사 부도로 거리에 내몰린 근로자들의 실업급여 신청자 수가 급격히 늘고 있고, 지난 9월 1만3000명이던 전북지역의 실업자가 한달 사이 2만1000명으로 늘었다는 통계는 시련의 신호탄일 것이다.
리먼브라더스 도산-물가폭등-환율상승-주가폭락 등의 상황을 정확히 짚어낸 어느 인터넷 경제논객만도 못한 정부의 위기분석과 안이한 대응이 위기를 키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스트레스 수치는 하늘로 치솟고 만다.
정치판에 희망을 기대는 것도 난망이다. 민생불안을 다독이고 기업투자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주력해야 할 국회는 서로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여와 야, 당내 세력들이 서로 헐뜯는 모습은 10년 전이나 똑같다. 이래 저래 죽어나는 건 서민이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건 심리적 패닉이다. 경제학자 마샬의 정의 처럼 "사람이 꽉 찬 극장에서 성냥불이 떨어진 걸 본 사람들이 서로 탈출하려고 좁은 비상구로 한꺼번에 몰리는 혼잡한 상황"이 패닉이다. 밟아 끄면 간단한 걸 확대 해석한 나머지 좁은 비상구로 몰리면서 위기를 자초하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뚜렷한 해법이 없다는 데에 더 큰 심각성이 있다. "단기적인 해결법은 없다. 지금은 끝까지 살아남는 게 이기는 것이다." 얼마전 전주에서 초청강연을 한 유종일 KDI교수의 지적처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해법이라면 해법일 터이다. "내년 중에는 경기가 바닥을 치고 올라올 것 같다"는 전망이 그나마 희망이다.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 라틴어로 "숨쉬는 한 희망은 있다."는 의미다. 현재는 고통스럽지만 참고 견디면 희망이 있다는 뜻이리라. 이명박 정부 들어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지금, 서민들에게 필요한 건 이런 '긍정의 인생학'이 아니겠는가.
송년 모임의 건배 구호로 '스페로 스페라'가 울려퍼지고 있다. 희망을 갖고 살아남자는 구호이지만 시대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아리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경재(본보 경영지원국장 겸 논설위원)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