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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사람] "셈하지 않는 맑은 영혼있어 마음따뜻"

구세군 전주본영 교회 이승엽·한세원씨

11일 전주오거리문화광장에 자선냄비를 설치하고 모금활동 시작한 구세군 사관 이승엽씨(오른쪽)와 담임보 한세원씨. 이강민([email protected])

1998년 12월 낮 최고 기온은 영하 5도였다.

 

며칠째 퍼붓던 눈이 멈추고, 날은 흐렸다. 흐린 날이 저물자 기온은 급속히 떨어졌다.

 

얼어붙은 거리에 바람이 불었고, 전주 객사 일대에는 몇몇 사람이 추위에 떨었다.

 

따뜻한 온기가 타인에 의해 불붙여지기만을 기다리면서, 기약없는 겨울을 통과해 나갔다.

 

경제 한파로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구세군 전주본영 교회는 올해도 자선냄비를 끌고 나섰다. 구세군이 한국땅을 밟은 지 100년, 거리의 무쇠솥이 자선냄비로 거듭 발전돼 온 지 80주년을 기념하는 순간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전후해 2주간 온기를 밝혀 줄 이들은 구세군 사관 이승엽(63)씨와 담임보 한세원(40)씨.

 

헌트, 롯데리아, 신포 우리만두, 현재의 금강제화에 이르기까지 가게가 여러 번 옷을 갈아입는 동안 자선냄비도 함께 해왔다. 난로 하나 없는 밖에서 기약없이 오가는 시민들의 애틋한 손길만을 바라보며, 모금액을 달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텼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실천하는 이들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모금액이 더 빨리, 더 많이 모입니다. 아이러니한 현실이죠. 도내 올해 모금액은 7300만원 정도로 잡았는데, 경제가 더 어려워진다고 하니 올해도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이사관의 대답에 한씨는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엔 눈이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염없이 눈을 맞아야 하는 고단함은 있지만,'척척' 호주머니를 털어내는 사람들 덕분에 뜻하지 않은 '대박'을 만날 수 있어서다. 순식간에 목표액의 2∼3배가 넘는 성금액이 모인 적도 있으니, 눈은 그야말로 반가운 손님.

 

첫날과 두번째 날까진 줄기차게 모아지다가 뜸해지고, 크리스마스 이브 즈음하면 또다시 자선냄비를 찾는 이들이 많아진다. 5∼6년 째 돼지저금통을, 봉투에 성금을 보내오는 날개 없는 천사도 있다.

 

자선냄비에 100% 헌금하는 이들은 유치원 어린이·초등학교 학생들. 냄비를 보면 호주머니를 만지작 거리다가, 부모· 함께 온 어른들을 졸라 몇 백원이라도 꼭 넣는다고. 한씨는 "말쑥하게 입은 이들은 오히려 곁눈질만 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며 "셈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겠다는 맑은 영혼들의 뒷모습에서 고생한 걸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길목에 자선냄비를 설치하느라, 점포 상인들·노점상과도 갈등 아닌 갈등을 빚기도 한다. 쉴 새 없이 울려야 하는 종소리가 시끄럽다고도 하고,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그날 매상이 보장되는 노점상들의 하소연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구세군 하면 자선냄비를 떠올리는 등식 또한 이들의 진가가 가려지는 대목이다. 구세군은 일년 내내 사회사업과 교회 선교로 바쁘지만, 12월 한달만 자선냄비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오인되기 때문.

 

평소엔 독거노인을 위해 매주 반찬을 만들어 방문하고, 도내 병원을 찾아가는 위문 공연과 함께 고아원 등도 꾸준히 도와왔다. 하지만 교인들에 의한 지원금과 자원봉사자로만 꾸려져 각종 반경을 더 넓힐 수가 없다.

 

"제 이름이 승(勝)에 빛날엽(曄)입니다. 야구선수 이승엽은 홈런포 한 방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하지만, 저는 영적으로 뜨거운 한 방을 날리기만을 고대하고 있죠."

 

도심 한복판에 있는 구세군의 종소리를 반기는 이들은 아름답다. 그들의 고귀한 사명을 인식하고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인기척, 인간이 인간에게 베푸는 절박한 신뢰이며 사랑의 표징이다.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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