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무엇을 믿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 있다. 당장 경제만 해도 아직 한국경제가 괜찮다는 쪽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한국경제가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할지 헷갈린다.
경제 같은 거창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라는 약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를 사랑한다는 그 사람의 말은 진실일지 아닐지 같은 문제처럼 일상 생활은 헷갈리는 것 투성이다.
'지식, 철학의 법정에 서다'(갤리온 펴냄)는 헷갈리는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으로 나눌 때 어떤 방법과 어떤 원칙을 따라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의 틀을 제공하는 책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속임수와 거짓말을 지구 끝까지 추적하는 철학 경찰관'을 자처하는 미국의 철학자 마이클 필립스는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믿을 만한 지식과 믿어서는 안 될 지식을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그런 틀을 제공하는 것이 철학이지만 저자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상아탑 안에 틀어박혀 고리타분한 연구에만 골몰했고 그 결과 그들이 쏟아낸 연구문헌은 하나같이 추상적이었다고 비판하며 실용적으로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다.
올바른 판단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오류 투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저자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백문이 불여일견' 같은 말을 믿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뇌는 불완전하고 모호한 자료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려 하고 암시와 기대감에도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억 또한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1986년 발생한 챌린저호 참사 사건 다음날 목격자들에게 사건에 대해 질문을 한 뒤 3년 뒤, 그리고 또다시 3년이 지난 뒤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다른 답변을 했지만 응답자들은 자신의 3년된 기억이 사건 다음날의 답변과 같았던 것으로 인식했다는 연구결과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기억뿐만 아니라 생각도 우리를 오류의 길로 인도하는 주범 중의 하나다. 사람들은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사례만으로 사실을 일반화하며 위험성과 수익성을 계산할 때 필요한 정보를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 또 자신의 믿음을 확증해주는 증거는 받아들이지만 반대의 증거는 외면하는 경향도 있다.
저자는 특히 직관에 휘둘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말콤 글래드웰은 베스트셀러 '블링크'에서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는 생각과 느낌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지만 저자는 직관적인 판단이나 결론은 결코 배경지식이나 이론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블링크'에 성공 사례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거나 오랜 시간 훈련을 통해 지식을 쌓고 능력을 갈고 닦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직관이 들어맞을 수 있었던 것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나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실, 외면했던 진실을 판단의 배경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오류투성이라면 나보다 똑똑한 남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연구소나 대학교, 언론 같은 '전문집단'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들 또한 항상 '정상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집단이 세계에서 자료(원료)를 추출하고 이것을 가공해 결론(완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기계와 비슷하다고 해서 이들을 '지식기계'로 비유하는 저자는 가끔 이 지식기계가 어처구니 없는 불량품을 생산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때도 많다고 이야기한다.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며 침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미국의 의학계, 연구비와 명예의 달콤한 유혹에 굴복해 실험을 조작하는 과학계, 정작 궁금한 사실은 알려주지 않는 엉터리 여론조사들, 사건이 없으면 조작해내기까지하는 언론계, 반대이론은 철저히 무시하는 심리학계 등이 오류를 일으키는 지식기계의 예로 제시된다.
'거창한' 문제 제기에 이은 해법은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어떤 지식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평가하는데 굳이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굳건한 증거가 제시되기까지는 상식을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게 그가 내놓는 지침이다.
그러나 저자의 지침보다는 모든 사람이 '검증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처럼 살 수는 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다시 한 번 바라보도록 하는 생각의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할 듯 하다.
홍선영 옮김. 박정하 감수. 360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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