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전문가들 "미륵사지 사리장엄과 비슷 백제유물 가능성 제기"
익산 왕궁리 사리장엄구는 어느 시대 유물인가.
통일신라 혹은 고려시대 유물로 알려진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사리장엄구가 백제시대 유물이라는 주장이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 발견과 함께 다시 주목받고 있다.
왕궁리 사리장엄구는 1965년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발견됐다. 사리장치 1식과 금제판경, 금동여래입상, 청동령 등이 발견, 1966년 국보 제123호로 지정됐다.
왕궁리 사리장엄구가 8∼10세기 통일신라시대 혹은 고려시대 초기 유물이라는 것이 통설로 자리잡은 것은 사리장엄구가 나온 왕궁리 5층 석탑의 연대에 맞춰 추정됐기 때문. 당시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백제의 양식과 형식의 영향을 받은 나말여초시대 탑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함께 발견된 금동여래입상 역시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것으로 보여진다는 분석이 많았다.
왕궁리 사리장엄구가 백제시대 것이라는 주장은 한정호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 연구원이 2005년 10월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발간한 학술잡지 「불교미술사학」 3집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됐었다. 당시 한 연구원은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사리장엄구의 편년 재검토'라는 논문을 통해 왕궁리 사리장엄구는 제작기법이나 양식으로 보아 백제시대 유물이나는 견해를 내세웠었다.
미륵사지 사리장엄이 1300여년 만에 그 모습을 드려내면서 왕궁리 사리장엄의 편년이 다시 떠오른 것은 두 사리장엄의 모습이 흡사하기 때문. 전문가들은 "일반인들이 봤을 때에는 왕궁리와 미륵사 사리장엄의 문양이 똑같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비교 대상이 되고 있는 유물은 미륵사 사리장엄구 중 금제 사리호(舍利壺)와 왕궁리 사리장엄구의 금제 사리내함(舍利內函).
미륵사 금제 사리호는 뚜껑과 목, 바닥에 연꽃잎을 넣었으며, 몸통에는 인동초와 당초문을 배열했다. 그 여백에는 우전문(=어자문)을 넣었다. 바닥에 가까운 몸통 바깥을 둘러가면서는 꽃봉오리가 3개가 난 문양을 일정하게 배치했다. 이와 유사한 문양은 왕궁리 사리내함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불교미술사를 전공한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은 현장설명회를 통해 미륵사 사리장엄을 확인하고 "왕궁리와 미륵사 사리장엄의 문양 형식은 같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며 "모델이 같다고 해서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백제계로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강소장은 특히 꽃봉오리가 세개 있는 삼엽화문과 꽃봉오리 둘레로 빗금 치듯 음각으로 새겨넣은 기틀문, 음각으로 작게 찍은 동그라미 모양인 우전문이 왕궁리 사리장엄과 미륵사 사리장엄에서 같은 스타일로 관찰된다고 밝혔다. 강소장은 또 "미륵사지석탑이 639년에 건립된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와 비교해 본다면 왕궁리도 아무리 늦어도 7세기 전반까지는 시대를 끌어올릴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전라북도의 연구자들은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불교미술을 전공한 전경미 예원예술대 교수는 "왕궁리 사리장엄은 전반적으로 고려시대 기법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백제시대 작품으로 단언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논문 '사리장엄구를 통해서 본 고려 금속공예'를 발표하기도 했던 전교수는 "어자문을 바탕에 찍으면서 본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려시대에 많이 보이는 예"라면서 "눈으로 보기에는 두 유물의 문양이 비슷해 보이지만 연장 사용 위치나 금박을 입힌 방법 등 좀더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왕궁리 5층 석탑내 발견유물 일괄을 소장, 현재 전시 중인 국립전주박물관 측은 시대를 삼국시대∼통일신라로 명기해 놓고 있다. 김종만 학예연구실장은 "박물관 입장에서는 사리장엄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되고 논문 발표 등을 통해 시기가 일반적으로 공증된다면, 그에 따라 연대를 수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