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창(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사람은 말로 산다. 말로 세상을 깨닫고 사물을 분별하며 정서를 가다듬는다. 사람 사이의 일도 말에 의해서 유지되거나 망가지거나 한다. 말의 정직함, 일관성, 그 내용의 충실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말은 쉽고 명쾌해야 하는데, 요즘 들어 말 때문에 사람들 생각이 더 복잡해졌다. 해괴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가장 분통 터질 일 가운데 하나가 곧 '건국 60주년' 논란이다. 정권이 바뀌면 나라의 나이도 바꾸는 것인가? 교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새 교장과 그 추종세력의 판단에 따라 개교기념일을 바꿨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헌법 전문에 버젓이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는 나라 이름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조차 부인하라니, 이걸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 한 생애를 다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테러리스트'라 부르란다. '테러'와 '민족해방운동'이라는 말을 분간할 줄 모르는, 아니 일부러 구별 안 하는 것은 조선총독부 시절의 일이다. 그 총독부의 말을, 식민해방 60년이 지난 나라의 선거에서 이긴 자들이, '그게 옳은 말이니 국민 된 자들은 의심 없이 따라 하라' 한다. 나라 나이는 60년으로 줄이고 싶은 이들이, 국립박물관의 역사는 100년이라며 식민지 박물관 시절까지를 나이에 넣어서 자랑하려 든다는 소문이 한 때 돌았다. 소문이길 빌지만, 그쯤 되면 정신착란 아닌가?
그뿐인가? '법치'를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정부에서 법이 정한 임기를 특별한 과오도 없이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고위직, 전문직 인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법에 정한 임기를 너무 강조하는 건, (법치를 내세우는) 새 정부의 철학에 맞지 않는다고 점잖게 둘러댄다. 이게 말인가? 이전 정권 때 말끝마다 '코드인사'를 성토했던 이들의 입에서 그 단어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새로운 인사가 '코드인사'인지 아닌지는 왜 묻지 않는가?
백 번을 양보해도 용산참사는 철거민과 용역직원과 경찰 모두의 과도한 행위가 직접적 원인이다. 물론 그 배경과 원인(遠因)에는 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거민들의 행위만을 대대적으로 성토하고 있는 법치국가의 법 집행자들과 막강 신문들을 보며, 저 주인 잃은 '법'과 '말' 앞에, 모국어 선생으로서 참담하고 부끄럽다. 아, 일찍이 '주어'가 없는 문장은 문장이 아니라며 모국어를 농락하던 그 화사한 대변(代辯)이, 누구보다 열심히 국어를 배우고 익힌 이의 혀끝에서 나왔으니, 이 '말'의 비극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촛불집회'덕에 뒷산에 올라 많이 '반성'했다던 이도, 그 덕에 추가협상이 유리하게 진행되었다고 너스레를 떨던 이도, 이제 촛불집회는 '광풍'이었다며 마녀사냥에 여념이 없다.
말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초시간적 동일성') 위에서만 말이다. 같은 말의 뜻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달라서는 안 된다. 더구나 나라 일과 관련한 말이 그렇게 오락가락하면 정말 큰일 난다. 큰일 안 났으면 좋겠다.
/곽병창(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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