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거의 붓을 놓고 사는
고희도 팔순도 지나면서
선생님처럼 많은 시를 쓴 시인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옥돌처럼 옥양목처럼 다듬어진 시들
갑오농민전쟁을 지리산을 뒤돌아보며
활화산처럼 거칠게 이글거리는 시들
선생님 쓰신 그 시들에는 도처에
풀밭이 우거져 있습니다
선생님처럼 풀에 매달려 시를 쓴 시인도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전원적인 것만도 사회적인 것만도 아닌
민중적 이미지를 표나게 덮씌우지도 않는
서서히 그러나 영원히 성장하는 시간을 거느리며
이 세상의 갈등과 고통과 허무를 가늠하고자 하는 그 풀밭은
사람이 끝끝내 이겨먹지 못할 허무의 지평에
촘촘히 돋아나는 그리움의 공간입니다
숙명처럼 견디고 살던 소외감과 참담함을 비집고
절망도 허무도 소외감도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마침내 이겨먹고야 마는 그런 풀밭입니다
푸른 하늘과 그리운 풀밭이 너무 멀어서
오솔길과 구수한 된장냄새와 군불 지피는 마을이 너무 멀어서
헛되고 헛된 것들이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멀어서
주워 온 아이 같은 소외감도 이제는 너무 멀어서
금강이나 만경강이나 동진강 하구의 어느 풀밭에
풋내 단내 살냄새 매움한 지상의 어느 풀밭에
이웃 같은 형제 같은 친척 같은 잎을 달고
마을에서 마을로 강으로 산으로 바다로 하늘로
뿌리들이 줄기들이 넝쿨들이 아득하게 뻗어나가는
먼저 간 사람들이 거기 다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풀밭에
우리끼리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가슴 속 쌓인 그리움들을 다 풀어놓고만 싶습니다
- 정 양(석정문학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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