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은 우주와 인간의 근본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理)와 기(氣)의 개념을 통해 우주의 생성과 구조, 인간 심성,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 등에 대해 형이상학적, 실천적으로 접근한다. 지금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았던 고리타분한 동양철학으로 외면받고 있지만 조선왕조 600년을 떠받쳐 온 정신사의 주류였다.
조선 성리학은 크게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나눠지며 각각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라는 걸출한 천재를 최고봉으로 한다. 여기서 이(理)는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만물의 운행 원리이며, 기(氣)는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만물을 만드는 질료와 같다. 주리론은 주로 영남학파, 주기론은 기호학파가 계승했다.
기호학파에 속하는 호남유학은 기대승 이항 김인후 등의 학자를 배출했다. 이들은 대부분 전남에 연고를 두었고 전북출신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끝자락에 이기경 전우 최병심 등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중 간재(艮齋) 전우(1841-1922)와 금재(欽齋) 최병심(1874-1957)은 최근 전주 한옥마을이 각광을 받으면서 그 정신적 배경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다가동에서 태어난 간재는 임헌회와 연을 맺고 기호학파의 적통을 이어 받았다. 심즉기설(心卽氣說)에 입각해 성사심제(性師心弟·본성은 스승이고 마음은 제자) 또는 성존심비(性尊心卑)로 대표되는 독특한 명제를 제시했다. 간재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척참오적'이란 상소문을 올려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했다. 이어 망명을 결심하고 서해 왕등도로 들어갔다. 그는 오진영 최병심 이병은 송기면 권순명 유영선 등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교동에서 태어난 금재는 '옥류동 최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간재 문하에 들어가 조선 성리학의 맥을 이었다. 간재처럼 본성이야 말로 우리 마음이 지향해야 할 확고부동한 규범임을 강조했다. 또 일제의 토지수용령에 항거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어찌보면 이들은 시대의 흐름에 앞서지 못하고 유학적 가치에 매몰된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학문과 정신은 한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한옥마을이 전통문화라는 햇볕을 받아 되살아나듯 오늘에 되살려야 할 가치다. 더우기 영남이 추로지향(鄒魯之鄕)의 자부심을 갖는 것과 비교해 더욱 그러하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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