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당시 서울 인구 열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봤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명절 때마다 텔레비전을 통해 되살아오는 단골 멜로영화이다. 신영균, 전계현의 이름을 세상에 뚜렷이 각인시켰고 아역스타 김정훈은 그 뒤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당대의 스타가 되었다. 평범한 유치원 교사의 기구한 사랑이야기였던 이 영화는 그 시절을 살던 많은 이들의 고달픈 삶을 눈물로 어루만져 주었다. 그 작품이야말로 온 국민들에게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슬픈 일'을 통해 '연민과 공포'를 극대화시킨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 비극인 셈이다. 그래서 명절만 되면 우리 여인들은, 음식 만들던 손으로 눈자위를 꾹꾹 눌러가며 마치 내 일이나 된 듯이 서럽게 함께 울어준 것이다.
그런데, 유부남 애인의 처사가 아무리 미워도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던 그 여인의 심정을, 사람들은 명절 때 말고도 심심치 않게 되뇌곤 한다. 선거철만 되면 언제나 별반 잘 한 것 없는 '미운' 후보들을 두고, 그래도 대안이 없으니 다시 밀어 줄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 오래된 영화 제목으로 대신 달래려는 것이다.
마치 망명정부라도 세운 듯이 해외에서 출마선언을 해 놓고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와서 자신이 만들고 대선후보까지 했던 그 당의 면전에 침을 뱉는 후보를, '미워도 다시 한 번' 밀어줄 수밖에 없다는 이 착한 시민들을 보면서 이 나라의 시계가 수십 년 뒤로 되돌아가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낀다. 자신이 주역이 되어 만든 정권, 그 정권 아래서 이룬 대북사업의 성과를 생애 최대의 치적으로 여기면서도, 그 정권의 주역들이 곤경에 빠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등 뒤에 칼을 꽂아대는 저급한 배신의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는 정치라는 괴물에 치를 떤다. 자신을 정계에 입문시킨 이도, 함께 정권을 창출했고 스스로 그 정권의 중추였던 동료들도, 잘 나가던 미국 대학 교수직을 버려두고 자신의 정치적 반려 노릇을 했던 후배도,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서 헌신짝처럼 차 버리는 그를, 이 착한 전주시민들은 '그래도 다시 한 번' 밀어주려 한다. 양손으로는 다친 동지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고, 입으로는 '어머니'를 외치며 흘러간 멜로 영화를 다시 틀어대고 있는 이 삼류 재개봉 영화관이 참 부끄럽다.
백 번 양보해서, 마지막 불씨를 고향 사람들이 다시 살려주기를 소망하는 그 심정마저 외면하지 못한다 해도, 아무리 미워도 차마 내칠 수 없는 게 전주 사람들의 심성이라 해도, 이른바 '무소속연대'라는 이름의 해괴한 야합까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다만 당과 그 지도부를 흠집 내기 위한 일념으로 낡은 지연과 학연에 기대어가면서 그야말로 '정-신 나간' 저주의 재를 뿌려대고 있는 모습까지도, 다시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 국민들이 가식과 부패와 패거리의식에 찌든 정치인들을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해 온 결과는 사실 너무 참담하다. 멀리는 오래 된 독재정권의 기억이, 가까이는 온갖 거짓으로 치장한 정권의 현실이, 모두 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해 온 탓이다. 이웃 논산의 시민들이 선거 때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인제가 지금보다 훨씬 큰 정치인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요즘은 명절이 되어도 '미워도 다시 한 번' 재방송 안 한다.
/곽병창(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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