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창(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참으로 착한 한 인간이 죽었다. 자기 조국을 사랑했고, 자신과 가족의 따뜻한 밥 한 그릇, 평안한 잠자리를 궁리하는 대신, 핍박받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못 견뎌 하던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신의 섭리를 저버린 일이라지만, 그런 걸 가려 자신의 길을 선택하기엔 그에게 주어진 세상이 너무 좁고 강퍅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순결한 영혼이고자 했다. 그 순결함이, 도덕적인 정치, 청렴한 대통령을 향한 그의 필생의 의지가 마침내 그를 봉화산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높은 도덕적 자존심과 구차한 현실 사이의 질긴 싸움 끝에 그는 스스로를 버렸다. 비극적인 바보 노무현은 언제쯤 그 결말을 알았을까?
비극은 마지막까지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극적 선택에 대한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외디푸스'도 그랬다. 나라의 운명과 스스로의 출생에 얽힌 진실을 알고자 했던 그 순간부터, 그 끔찍한 비극의 시계바늘은 여지없이 돌아서 그의 몰락을 불렀다. 진실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의지를 불태우면 불태울수록 비극적 주인공들의 최후는 점점 더 빠르게 다가온다. 외디푸스의 '비극적 결함(hamartia)'이 진실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었다면, 노무현의 그것은 더러운 현실에 어울리지 않게 높은 도덕적 이상이었다.
그는 말 뒤집기를 밥 먹듯 하고 거짓말과 배신을 태연히 저지르는 이 나라의 평균적 정치인들과 달랐다. 이 더러운 한국 정치의 늪에 자발적으로 뛰어든 그 순간부터 인간 노무현의 비극은 싹텄다. 감히, 대학도 못 나온 주제에, 돈도 줄도 변변치 않은 주제에, 수십 년 덕지덕지 쌓아온 계보와 부패정치의 성곽을 허물겠다니, 그건 불을 지고 섶에 뛰어드는 일이었다. 그 거대한 거짓과 탐욕의 풍차에 돌진한 결과는 돈키호테보다 더 끔찍한 비극으로 끝났다. 적들은 생각보다 더욱 막강했고 겁 없는 도전자에 대한 응징은 날카롭고 집요했다. 돈키호테 노무현의 창은 너무 무거웠고 그의 이상을 실어 나를 애마는 아직 덜 자랐으니, 그가 말에서 내린 순간 남은 것은 집요한 보복의 칼날뿐이었다.
그것이 이 비극의 전말이다. 이 나라 평균 국민의 상식으로는 결코 따를 수 없던 높은 이상을 세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 국민들의 세상이 더욱 깨끗하고 평화롭게 되기를 바랐던 한 인간이, 결국은 평균적 인간들의 야유와 조롱 속에 스스로 세운 이상을 무참히 꺾고 떠났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국민들을 향해서 자신을 버려달라는 말을 남겼다. 외디푸스는 생모가 곧 아내라는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두 눈을 찌르고 광야로 떠났지만, 유랑할 광야조차 허락받지 못한 이 나라의 전직 대통령은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어' 허공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비극은 깨달음을 남겨야 비극이다. 이 비극 앞에서 목 놓아 우는 동안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어떤 고결한 영혼도 설 자리를 찾을 수 없는 이 위선과 탐욕의 정치판, 휴전 60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좌빨' 타령으로 소일하는 돌심장들, 동서로, 남북으로 갈려 제각기 저주와 분열의 진지전을 이어가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적 조폭들, 욕망의 탑을 쌓느라 눈 뜨고도 진실을 보지 못 하는 청맹과니 백성들을 향해, 그가 허공에서 지금 외치고 있다. 제발 그만 하자고-. 저주는 저주를 낳고 보복은 보복을 부른다. 이 비극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눈물 속에서 우리가 마침내 서로 뉘우치고 정화(淨化)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서 국밥을 사 먹을 것이고, 착한 대통령 노무현은 생사의 긴 틈새를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삼가 고인의 남은 긴 길에, 봉화산 꽃향기 내내 그윽하기를 빈다.
/곽병창(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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