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창(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기사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읽던 시골 선비(hidalgo) '알론소 퀴아노'는 늘그막에 가슴에 불타오르는 열정을 담은 채로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돕고자 길을 떠난다. 그는 '돈키호테(Don Quijote)'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비쩍 마른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편력의 길을 떠난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라만차(La Mancha)의 들판을 걸으면서 그의 이성이 잠시 작동을 멈춘 사이에,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심장이 시키는 대로 마지막 삶을 불사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양떼를 백만 군졸(軍卒)로 착각해 돌격하거나, 풍차를 흉악한 거인으로 몰아 달려들고, 여관집 하녀인 알돈자를 둘시네아 공주라 부르며 흠모하기도 한다. 그의 이런 행위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거나 놀림감이 될 뿐이었다. 즐겨 읽던 책에 나오는 대로 스스로 행하고자 했던 그의 순진함이 현실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으로 되돌아왔다.
소설 속 돈키호테의 시대착오적인 꿈과 무모한 도전은 많은 이들에게서 멸시와 조롱을 받았지만, 현실에서의 그 이름은 시대를 뛰어넘어서 불의에 눈 감지 않는 정의와 분투의 상징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자리잡았다. 또 그보다 조금 먼저 세상에 알려진 '우유부단한 이성'의 표상 '햄릿'과 대비되는 '저돌적인 열정'의 표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인간의 얄팍한 이성과 눈 앞의 객관적 사실만을 중시하며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일은 철저히 피해가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훌륭한 우화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돈키호테의 뒤를 따랐는가? 당대의 주류 권력과 기생(寄生) 지식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짓과 불의의 풍차를 향해, 맨몸으로 달려들곤 하던 시대착오적 이상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멀리 싯달타와 예수가 그랬고, 허준과 김정호와 전봉준이 그랬다. 아주 가까이는 김구와 전태일과 문익환이 그러했으니, 그들은 모두 당대의 권력으로부터 조롱받는 자였고 고통을 당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 쥔 자들이 보지 못 한 저 거대한 불의의 성채를 꿰뚫어 보았고, 세상이 뒤에서 조롱할 때 그 불의의 성을 부수려고 죽기 살기로 돌진하였으며, 고통 당하는 더 많은 이들과 더불어 세상을 마친 이들이다. 그들의 육신을 핍박하고 영혼을 조롱한 이들은 늘 이긴 자들, 총칼을 쥔 자들이었으니 그들 이긴 자들에게 세상의 어두운 그늘과 부정한 풍차가, 욕망의 거짓 성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런즉 그 눈에 저들 돈키호테는 영원히 허상과 싸우는 존재로만 보일 것이다.
전직대통령이 나라의 현실을 우려하며 몇 마디 개탄한 것을 두고 세상의 화려한 입들이 돈키호테 같은 노인이라며 조롱한다. 사리분별이 흐려진 노인이 내던지는 무모한 언사쯤으로 깎아내리고 싶은 생각임이 분명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찬사가 없다. 두 눈 멀쩡히 뜨고도 세상이 잘 안 보이는 이들이나, 한쪽 눈만으로 세상을 보고 싶은 철 지난 포수들에게는 능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돈키호테들은 따로 있다. 광장을 막은 차벽이 그냥 차벽으로 보이지 않고 거짓의 산성으로 보이는 이들, 높은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불의를 보고 손가락질했다가 파면 당하고 고발 당하는 6급 세무공무원, 저들이야말로 빈약한 애마를 타고 낡은 투구를 썼으나, 눈 앞에 어른거리는 불의의 풍차를 향해 앞뒤 안 가리고 차례로 돌진하는 이 시대의 돈키호테들이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전직대통령의 입이 아니라, 가진 것도 뒤에 의지할 것도 없이 차례로 돌진하고 있는 저 광장의 돈키호테들 아닌가?
/곽병창(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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