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랜덤하우스·2009>숨가쁜 일상 속, 걷는 즐거움을 느끼다
'제주도의 '올레길'처럼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둘레길' 조성 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전북도는 (…) 녹색성장을 주도할 둘레길을 7월부터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북일보 6월 15일자 기사의 일부다. 바야흐로 '걷기의 시대'가 온 것인가?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걷기가 '이벤트'를 넘어서 우리의 일상적 삶에 정착하기까진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우리땅 걷기 운동' 이사장 신정일의 「꿈속에서도 걷고싶은 길」(랜덤하우스, 2009)을 읽는 것에서부터 출발해보면 좋겠다. '길의 시인, 신정일의 우리 땅 걷기 여행'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시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글과 그림이 아름답다. 신 시인의 서문부터 들어보자.
"꽃 피는 봄날 이 꽃 저 꽃에 눈길을 주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걸으면 좋은 길이 있다. 뜨거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걸으면 제 격인 길이 있다. 온 산천이 단풍으로 붉게 물드는 가을 혼자서 휘적휘적 걸어가면 좋은 길이 있다. 눈이 내리는 겨울, 헐벗은 겨울나무들을 벗 삼아 걸어가면 안성맞춤인 길이 있다. 계절에 따라 걸어가면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길, 그 길을 찾아 나서거나 문득 걸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세상이라는 요지경 속에 그렇게 많은 길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끊어지는지를. 알 수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그 길들이 숨어서 언젠가 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 길을 혼자서 혹은 누군가와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전주시민으로서 매일 걷기의 축복을 누리고 사는 내겐 이 말이 가슴에 팍 와 닿는다. 송천동에서 덕진공원을 넘나들며 전북대까지 가는 길은 짧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길이다. 뭐 대단한 호수는 아닐망정 때론 연못 위를 뒤덮은 안개까지 맛볼 수도 있고, 공원 특유의 한적함과 아늑함까지 보너스로 더해진다. 그 길을 휙휙 자동차로 내달리는 사람들은 물론 자전거로 지나치는 학생들마저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다. 내가 자전거에서 걷기로 '전향'한 건 바로 그런 '여유'라고 하는 점에서 걷기가 자전거 타기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길에도 자주 감격할진대, 신정일이 말하는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은 도대체 어떤 길이란 말인가? 책에 소개된 40개의 전국 코스 중 전북은 6개를 차지하고 있다. 내 식으로 해설하면 글 버린다. 신 시인의 시적 묘사와 함께 그 6개 코스를 음미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고창 해리 홍골에서 선운사까지 : 누구나 마음 속에 간직한 소망이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가슴 설레는 그런 소망, 그 소망을 풀어내기에 알맞은 곳이 바로 해리에서 선운산을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동백꽃이 피어나고 녹음 무성한 시절이 지나면 새빨간 상사화가 길을 물들이고, 곱게 단장한 단풍이 서럽도록 흩날리는 그 길을 걷노라면 사랑도 그리움도 깊어간다.
(2) 장수 천천에서 용담댐까지 :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도보답사를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적 현장을 찾아 잊고 살았던 그 사건을 뒤돌아보는 일도 의미가 있다. 특히 당시의 상황과 주요 인물들을 유추해보는 것은 역사의 현장 답사에서 큰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금강의 최상류천인 장수천과 장계천이 합류하는 천천교에서 기축옥사의 현장인 죽도와 천반산 일대를 따라가는 여정에는 역사가 살아서 움직인다.
(3) 문수사에서 장성의 측백나무 숲으로 가는 길 :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곳 하면 사람들은 정읍의 내장산을 떠올리고 단풍이 절정일 때면 그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풍이 아름다우면서도 그렇게 번잡하지 않은 곳은 없을까? 있다. 그곳이 바로 고창군 고수면 문수사 일대의 단풍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단풍 숲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가 고개만 넘어가면 축령산 편백나무 숲길이 이어져 황홀하리만큼 아름답다.
(4) 지리산 둘레길 1·2구간 : 이중환은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은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하는데 소위 삼신산이다"라고 하였다. 조용헌 선생은 육산(肉山)인 지리산과 골산(骨山)인 설악산을 빗대어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기운이 빠져 몸이 쳐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지리산을 바라보면서 지리산 품에 안겨 걸을 수 있는 장거리 도보답사 길이 바로 지리산 둘레길이다.
(5) 김제 귀신사에서 원평까지 : 모악산을 일컬어 위대한 어머니의 산이라 부른다. 드넓게 펼쳐진 호남평야의 동쪽에 자리 잡은 평지돌출의 모악산에는 후덕한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사연을 안고 찾아들었다. 미륵사상을 전파한 진표율사, 조선의 혁명가 정여립, 그리고 한말의 종교사상가인 강일순. 계룡산과 함께 기도처가 많기로 소문난 이 산자락에 위치한 귀신사에서 원평에 이르는 길에는 그들의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있다.
(6) 회문산 자락 지나 섬진강 적성강변까지 : 이른 봄 선진강변은 매화꽃이 피는 광양의 매실마을, 산수유꽃 피는 구례 산동 등 온통 꽃들의 향연이다. 그러다 보니 섬진강은 하류만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섬진강의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 회문산 자락을 지나 순창군 적성면으로 이어지는 적성강변이다. 김용택 시인의 절창 섬진강이 구구절절 흐르는 천담, 구담, 장구목을 걸어가면 섬진강이 그대에게 건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미처 소개하지 못했지만, 이 책엔 시적 언어만 있는 게 아니다. 역사 이야기는 물론 이 길에선 무슨 영화가 촬영됐다는 식의 대중문화 정보까지 들어있다. 장구목 부근의 요강바위가 지난 94년 도난 당해 경기도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사연 등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
이 책을 감상하면서 하나의 역설이 떠올랐다. 우리의 속전속결식 압축성장이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을 보호해준 게 아니냐는 역설이다. 많은 나라들이 정부 정책 차원에서 국내 자동차 여행을 '애국심'과 연결시켜왔다. 20세기 초반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이론하에 도로는 그런 시각적 볼거리를 많이 보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건설되었다. 반면 '공기 단축'을 최대 목표로 내세워 건설된 한국의 도로는 그런 '사치'를 부릴 겨를이 없어 그 어느 곳에서건 직선을 선호했다. 그 덕분에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볼 게 별로 없지만, 차에서 내려 걷기로 돌입하면 보물같은 곳들이 무수히 많다. 언제 이 가설을 입증하는 논문이라도 한 편 써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1993년에서 94년까지 한국사회를 강타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문화적 사건'이 되었지만, 그건 당시 찾아든 '마이카시대'의 안내서 역할을 했다. 이제 신정일의 '우리땅 걷기 운동' 시리즈는 '걷기 시대'를 여는 복음서가 되고 있다. 뒤로 돌아간 것 같지만, 실은 우리는 그만큼 진보한 셈이다. 도시에서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을 찾는 건 어렵겠지만, 적어도 '마스크 쓰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길'이라도 많아졌으면 하는 꿈을 가져본다.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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