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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책으로 읽는 세상] ⑭한국의 간이역

<임석재글,사진·인물과사상사·2009>간이역의 '수탈'과 '낭만'

일제 강점기의 건축 유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문제가 간단치 않다. 아니 매우 뜨겁다. 이 논란의 한복판에 전북이 있다. 일제가 세운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해방 후 한때 나이트클럽이 들어서기도 했으나 오랫동안 방치돼오다 지난해 등록문화재 제374호로 지정됐는데, 이를 두고도 말이 많다. 올해 초 장세환 민주당 의원(전주 완산을)은 일제 수탈 시설물을 문화재로 등록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문화재보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함으로써 논란을 본격화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런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출간된 임석재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의 「한국의 간이역」(인물과사상사, 2009)은 이 문제의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건축기행, 새롭게보는 문화재 간이역-수탈과 낭만의 변주곡 사이에서'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간이역이야말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건축 유산이기에 애증(愛憎)의 대상이다. 간이역은 원래 일제의 수탈을 위해 지어졌지만, 해방 이후엔 낭만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느 쪽에 더 주목해야 할 것인가?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이 책은 양시론(兩是論)을 취하고 있다.

 

"아픈 역사를 배우고 그 아픔에 동의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의외로 즐김이 유용할 수 있다. 간이역을 돌면서 묵념하고 통곡하고 분개할 수만은 없는 일이며 전부 헐어버리고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픈 고통을 겪었던 쓰라린 역사의 현장에서 사춘기 소녀마냥 시나 쓰고 안개 자욱한 사진이나 찍어대고 있는 것도 썩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즐기고 놀되 그 역사를 반추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느끼는 서정성은 한층 단단하고 성숙한 것이 된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쓴 이유이자 목적이다."(10쪽)

 

지금까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기차역은 모두 23개인데, 이 책은 이 가운데 16개의 역을 일본형, 한국형, 산간형, 도심형, 바닷가형 등으로 분류해 다루고 있다. 임 교수가 직접 전국을 돌면서 사진을 찍고 사람들을 만나 증언을 청취하는 등 그야말로 온몸으로 쓴 기록이다. 이 책은 익산의 춘포역과 군산의 임피역에서부터 출발한다. 1910년대 중후반 익산·군산 일대가 간이역의 탄생지였기 때문이다. 간이역의 표준설계는 이 두 곳에서 완성되었는데, "두 역 모두 한반도 남부의 대표적인 곡창지대 김제평야와 만경평야에서 추수한 곡식을 군산항까지 옮겨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전진기지였다."(27~30쪽)

 

공식기록상 춘포역의 건립 연대는 1914년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차역인데, 이에 대해 임피역 측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임피나 군산에서는 임피역이 가장 오래된 역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1912년이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대중적으로 임피역이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언론은 임피역을 가장 오래된 간이역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두 역을 대하는 현지의 입장을 봐도 임피역은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는데, 춘포역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다."(61쪽)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에서 '일본화의 강압 속에 숨은 저항'을 찾아내는 게 흥미롭다. 임 교수에 따르면, 일본식 주택은 비례와 형상 모두 수직 느낌이 주도하는 반면, 한국식 주택은 수평 분위기가 주도한다. "이런 특징은 일제강점기 때 대도시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식 주택과 대비되는 도심형 한옥으로 나타났다. 서울에서는 후암동-청파동-원효로 일대의 일본인 동네에 맞서 돈암동-정릉-혜화동 일대가 대표적인 예다. 전주 한옥마을도 성 안의 일본인 동네가 싫어 성 밖으로 뛰쳐나와 한옥으로 새로 지은 동네이다."(138쪽)

 

그렇다면 간이역들엔 그런 '저항'이 없었을까? "한반도 전국 각지에 많은 역들이 지어질 당시 100 퍼센트 일본인들이 설계하고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들도 일정 부분 참여하고 의견을 내면서 한국의 정서가 조형 처리로 전환되어 반영되었을 것이다. 한국 땅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의 정서가 스며들었을 수밖에 없다. '장소의 혼' 혹은 '장소의 힘'이라는 것인데 '인삼을 일본에 심으면 무가 된다'라는 속담을 뒤집어 생각하면 된다."(215쪽)

 

일본식과 한국식이 결합된 건축물을 보면서 어느 쪽에 더 주목하는 게 좋을까?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점이다.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모든 분야에 걸쳐 일제 강점기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 자세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상대주의의 미덕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와 관련, 임 교수가 간이역들의 건축 스타일 비교를 통해 한일(韓日) 국민성의 차이를 읽어낸 대목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일본 사람들은 단순하다. 복잡한 것도 단순화시킨다. (…) 한국 사람의 눈에는 기인열전으로 보일 만큼 일본에는 각 분야에서 한 우물만 파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런 절대주의 문화의 사람들은 줄도 잘 서고 두목-부하의 계급적 순종이 몸에 배어 있다. 춘포 역과 임피역에 나타나는 분위기가 그렇다."(134쪽)

 

반면 한국인들은 상대주의를 신봉하며 변화무쌍하고 복잡하다는 게 임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국민성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입시키면 한국다운 인(仁), 혹은 인정의 문화가 된다. 정(情)이라는 게 별 게 아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복잡하고 다양하게 만들다 보면 생기는 게 정이다. 어느 선 이상으로 단순화시키면 개체의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게 가슴 아파서 못하는 것이다. 가급적 각 개체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자는 것이 한국다운 상대주의의 핵심 개념이다. 도저히 못 참을 상황이 아니라면 개체의 편안함이 우선이다."(135쪽)

 

이런 차이가 건축물에까지 반영돼 있다는 게 재미있다. '건축 미학'보다는 '건축 사회학'에 더 관심이 많은 내 입장에선 춘포·임피역에 이어 일산·신촌역 이야기에 눈길이 갔다. 일산의 아파트숲에 포위된 일산역이 동네 어르신이나 중고생들 놀이터를 겸하고 있다는 게 흥미롭지 않은가. 임 교수는 "전체 계획 없이 오래된 것들과 새 것들이 뒤섞이다 보니 역 주변 풍경이 한국 현대사를 닮아 있다"며 "급격하게 진행된 압축 근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191쪽)

 

지금은 거대하고 화려한 쇼핑몰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신촌역은 어떤가. 분단되기 이전의 신촌역은 경의선의 출발점으로 한반도의 서북쪽, 더 나아가 만주까지 나가는 제법 큰 관문이었지만, 오늘날엔 같은 이름의 지하철역이 생기면서 '신촌 기차역'으로 불린다는 게 신촌역의 서러운 처지를 말해준다. 그렇지만 남북관계가 풀리면 신촌역은 "남북화해의 준비 공간이자 통일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는 게 임 교수의 전망이다.(293쪽)

 

화해는 남북은 물론 여야(與野), 보수·진보 사이에도 필요하지만,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간이역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게 필요하리라. '수탈'만 강조하는 쪽과 '낭만'만 강조하는 쪽이 양시론의 중간지대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알아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 괜한 말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앎을 제공하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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