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환(전북도 홍보기획과장)
지난 6월, 북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유럽의 거리를 걷는 동안 내 손에는 늘 위치우이의 책이 들려 있었다. 그가 쓴 〈유럽문화기행〉은 한 문명과 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나침반과도 같았다. '한 문명이 외부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없다면 자신의 역사 또한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마치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 같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박물관거리였다. 마인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박물관 거리는 크고 작은 박물관들이 모여 있어 마치 작은 마을처럼 보인다. 흔히 박물관하면 거대한 건물과 방대한 유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구 국립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 보데 박물관 등 진귀한 유물을 소장한 박물관들이 있고, 이 가운데 건축박물관, 유대인박물관 같은 테마별 박물관들이 섞여 있다. 이 때문에 박물관 거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원래 이곳이 부둣가 창고단지였다는 점이다. 19세기 초에 이 일대를 매립하면서 건축가 쉰켈의 주도하에 최초로 박물관이 들어섰고, 이후 갖가지 박물관이 들어서면서 명소가 된 것이다.
이런 사례는 유럽 어딜 가나 한 두 개씩은 있다. 영국의 시골마을 '헤이 온 와이'는 책마을로 유명하다. 1962년 리차드 부스라는 사람이 낡은 성을 사서 헌 책방을 열었고, 세계 곳곳의 헌책들을 사서 모았다. "이곳에 가면 헌책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마을 전체가 헌책방이다. 37개의 헌책방과 16개의 갤러리에서는 세미나, 강연회, 작가와의 대화가 열린다. 그들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인구 1천3백 명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마을이 세계적인 명소가 된 것이다.
창고를 박물관으로, 낡은 성을 헌책방 마을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발상의 전환이다. 나는 전주 한옥마을을 박물관마을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옥의 느낌과 구조를 그대로 살려서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굳이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도 없고 거창한 유물을 들일 필요도 없다. 옛 선조들이 썼던 농기구 박물관, 고서?고지도 박물관, 생활용품 박물관, 사투리 박물관…. 생활 속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도구들이 모두 박물관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영국의 책마을처럼 주민들이 직접 박물관을 운영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너무 터무니없는 발상이라고? 모든 성공한 문화도시는 터무니없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개발계획을 세우고 인공조형물로 치장하는 것이 쉽고 빠른 길일 수 있지만, 그것은 빨리 망하는 길일 수도 있다.
위치우이는 문화도시의 등급을 세 단계로 매겼다. '맨 아래 등급은 생활에 가치를 두는 것이고, 그 다음 등급은 역사에 가치를 두는 것이고, 가장 높은 등급은 자연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자연 그대로 두는 상태가 가장 높은 문화라는 얘기다.
'진정한 문화인 혹은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문화예술계 안에서 있는 힘을 다해 반대자 노릇을 하는 일'이라고 했던 콜링우드의 말을 새겨본다. 그러기 위해서 문화관계자들은 더 멀리 떠나볼 필요가 있고, 말갛게 씻긴 눈으로 모든 문화현상을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전성환(전북도 홍보기획과장)
▲ 전성환 과장은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주)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서울미디어 대표이사,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외래교수를 거쳐 현재 전북도청 홍보기획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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