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분업화한 직원들과 기계가 똑같은 비스킷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장. 사방팔방 사각의 콘테이너 박스가 쌓인 항구. 인생의 방향을 잃은 구직자들이 줄 잇는 직업 상담소.
알랭 드 보통이 일상과 인생을 새롭게 발견하고 해석하는 철학적 글로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가이기는 하지만, 스트레스 덩어리인 일의 세계에서 철학이나 미학을 찾아내겠다니 얼핏 생각해도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일의 기쁨과 슬픔'(이레 펴냄)을 펼쳐 몇 장만 읽어도 금세 녹아 버린다. 이 책은 오히려 사랑이나 여행, 건축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전작들보다 더 쉽고 유익하며 열정적이다.
무엇보다 사회에 발을 내디딘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이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현대인들의 아픈 곳을 제대로 짚어주고 다독이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일하는 세계의 아름다움, 권태, 기쁨, 가끔 느껴지는 공포에 눈을 뜨게 해주는 책을 쓰고 싶었다"며 "일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그 엄청난 주장을 한번 파헤쳐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의도 그대로 이 책은 일에서 기쁨과 슬픔, 즉 '감정'을 찾아 나가는 여정을 담는다. 일의 의미란 거창한 담론에 근거해 증명하는 게 아니라 일터에서 느끼는 사람다운 감정을 통해 소박하고도 현실적으로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저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우주로 위성을 쏘아 올리는 로켓 과학보다 비스킷 공장에서 반죽과 포장을 고민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소박한 동기를 자극하는 직업상담사와 같은 '어린이 책에 흔히 등장하지 않는' 직업인들이다.
아침 아홉 시부터 정오까지 공복감을 달래주는 간식거리를 만드는 비스킷 공장 일을 보자. 5천명이 6개 작업장에 나뉘어 매달리는 이 일이 '존재의 짐을 덜어주는 숭고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한 과자 공장의 공정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공항 관제탑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엄숙한 분위기'와 '병원을 운영하는 데 필요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의 헌신과 자기 규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저자는 문명의 본질을 되새기며 비스킷 제조의 의미를 찾아낸다. 문명은 소비주의를 매도하고 예술과 영적 가치를 찬양하지만, 사소한 것들을 팔아 부(富)를 늘리면서 유지되고 발전한다.
"나는 우리 노동의 진부함을 생각하며 희미한 절망감을 느끼다가도, 거기에서 나오는 물질적 풍요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유치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한 투쟁과 절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문 직업상담사가 구직자에게 상담을 해주거나 직장인들을 독려하는 일을 보자.
저자는 한 상담사가 직업인들에게 "의지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외치도록 하는 동기부여 훈련에 곤혹스러워한다. 지적인 시각으로 보면 지나치게 솔직한 처세술을 담은 이런 말들은 저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저자는 곧 "우리에게는 소박한 요구가 몇 가지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지원과 사랑에 대한 꾸준하고 강렬한 갈망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통은 일이란 사람들에게 거품에 불과한 희망일지라도 온 정신을 쏟도록 하며 특별한 감정과 품위를 안겨주는 존재라고 결론 내린다.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 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줄 것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여행의 기술', '행복의 건축' 등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을 번역한 정영목 씨가 번역했다. 376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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