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경·김양미 옮김·CM비지니스·1997>할리우드식 승자독식 이대로 둘 것인가
승자 독식주의가 한국사회를 갈등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각기 미국 코넬대학과 듀크대학의 공공경제학과 교수인 로버트 프랭크(Robert H. Frank)·필립 쿡(Philip J. Cook)의 「이긴 자가 전부 가지는 사회」(권영경·김양미 옮김, CM비지니스, 1997)를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게 좋겠다. 미국에선 1995년에 출간된 이 책은 미국사회를 '승자 독식사회(The Winner-Take-All Society)'로 이름 붙이며 그 실상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다. 이들의 결론은 이렇다.
"변화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승자독점시장의 역할을 분명히 파악한다면, 이에 필요한 조치가 별로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지혜는 상호 대립적으로 작용하는 상충관계들로 가득찬 세계를 묘사한다. 우리는 이러한 염세적인 세계관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경제의 최고 승자들에게 보다 무거운 조세부담을 주면 경제계에 질서가 잡힐 뿐 아니라, 가장 재능있는 시민들로 하여금 가장 생산적인 일들로 방향전환하게 할 수 있음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뭘 이 정도를 가지고 흥분하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포천」지가 1990년에 실시한 500대 기업 및 500대 서비스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다. 답변을 얻어낸 전·현직 최고경영자 1,500명의 출신 대학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다. 이 조사를 한 사람이 놀랍다는 듯 내놓은 다음과 같은 분석이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아이비 리그의 지배력은 증가하고 있다. 조사대상자 중에서 전직 최고경영자의 14%가 아이비 리그의 학부 졸업생인데 반대, 현직의 경우는 거의 19%에 이르고 있다."
이 책은 이 통계 외에도 아이비 리그로 불리는 동부 명문대학들의 승자 독식주의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우리 입장에서 보기엔 그저 가소로울 뿐이다. 아이비 리그에 속하는 대학은 13개다. 이 대학 출신들을 다 합쳐봐야 대기업 상층부의 겨우 20% 미만을 먹고 있을 뿐이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다음 통계에 주목하시기 바란다.
①1995년 외무부 외시 출신 외교직 7백30여명 가운데 80%. ②1960년대 이후 1990년대까지 중앙지 편집국장 184명 중 77%. ③2001년 한해 동안 7개 중앙일간지에 칼럼을 실은 외부 기고자의 73%. ④김영삼 정부 각료의 68.1%. ⑤2004년 전국 고등법원 부장판사 이상 127명 가운데 87.4%. ⑥2005년 청와대 중앙 행정부처의 1급 이상 302명의 66.9%. ⑦2005년 전체 장차관급 공무원의 62.2%. ⑧2002년부터 2005년까지 사법연수원 입소자의 63.1%. ⑨2006년 국내 4대그룹의 사장급 이상 주요 경영자의 65.8%. ⑩2007년 국내 1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68.8%.
무슨 통계인가? 이른바 SKY(서울-고려-연세) 대학 출신 비중이다.(④⑤는 서울대 출신만의 비율이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SKY 출신은 상층부의 50∼90%를 점하고 있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한국의 학부모가 목숨 걸다시피 하면서 자식을 SKY에 보내려고 하는 건 매우 합리적인 현상이다. 미국엔 대학이 많기 때문에 아이비 리그 대학이 20%를 먹는 것도 우리에 비해 과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점에 대해선 전 서울대 총장 정운찬의 지적을 상기하는 게 좋겠다.
정운찬은 서울대 총장 시절인 2005년 1월 "현재 서울대는 학부생 2만1000명에 대학원생이 1만1000명 가량 됩니다. 전체 3만2000명인데, 아주 많은 것이죠. 이것은 하버드대의 2배, 예일대의 3배, 프린스턴대의 5배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구 2억8,000만명인 미국의 상위 10개 대학의 총 졸업생이 매년 1만명에 불과한데 인구 4,700만명인 한국에서는 SKY에서만 1만5,000명의 졸업생이 나온다고 지적하면서, 형평성, 효율적인 학교 운영, 연구와 교육의 질 등을 위해 SKY의 정원 대폭 감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는 "내 자식을 SKY에 보내면 되지"라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는 우리가 미국보다 훨씬 더 승자독식 체제에 친화적이라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최근엔 입학사정관제인가 뭔가 하는 게 나왔는데, 만약 이게 지금과 같은 치열한 입시전쟁의 개선을 위한 목적이라면 그건 '사기극'이라고 단언해도 좋다. 승자독식 체제를 완화시킬 생각은 않고, 그걸 전제로 한 변화는 그저 학생과 학부모들을 추가로 괴롭히는 '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신약성경 마태복음 25장 29절 말씀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은 이 구절을 원용해 승자독식을 '마태효과'라고 불렀다. 이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분야가 바로 대중문화 시장이다. 연예인들에게 스타가 되느냐 되지 못 하느냐 하는 건 생사(生死)의 문제다. 출판시장의 베스트셀러도 마찬가지다. 일단 스타나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면 성공이 성공을 낳지만, 거기에 끼지 못하면 검증받을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마태효과'가 발생하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우리 인간의 인지적 한계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사람들은 7개 이상의 항목이 기재된 리스트를 두뇌에서 처리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 7은 마법의 숫자다. 7 이내여야만 한다. 7에 속한 이들에겐 번영과 영광, 7에서 탈락된 이들에겐 무관심과 소외만이 있을 뿐이다. 한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프린스턴 대학을 전국 10대 법과 대학원 중의 한 대학으로 지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린스턴 대학에는 법과 대학원이 없다! 이게 바로 명성의 속성이자 파워다.
승자독식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인지도 모른다. 번식기에 있는 바다표범은 많은 수컷들 중 오직 4%의 수컷들만이 출산된 새끼들 중 90%나 되는 새끼의 아비가 된다. 거의 모든 동물들이 다 그렇다. 인간은 그렇지 않지만, 사회내의 승자를 선출하고 그 승자들에게 번영과 영광을 독식케 하는 점에선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경쟁과 탐욕을 예찬하는 이들은 승자독식이 그것들을 부추기는 동력이 돼 사회발전에 기여한다고 믿는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도 보아야 할 게 아닌가. 비정규직 문제에서부터 대기업 유통업체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요 사회문제들이 바로 승자독식과 관련돼 있다. 대다수 한국인들이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도 그 파워엔 경외감을 보이는 것도 바로 승자독식 때문이다.
우리는 승자독식 체제 자체를 바꿀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우리 편이 다 먹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면 천지가 요동하는 것처럼 모든 게 뒤엎어진다. 정권 잡았을 때 승자독식 체제를 바꿔 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정권 잃고 나서 아무리 분노와 저주의 목소리를 쏟아내도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거가 국가적 도박 축제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 전 분야가 경쟁적으로 할리우드식 승자독식 체제를 흉내내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둘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다.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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