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암산서 '천년의 역사' 시작
▲ 옥류동에서 교동시대를 열다.
옛날에는 도읍, 읍성, 마을을 조성하는데 풍수지리를 매우 중시하였다. 전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풍수의 기본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이다. 그런데 전주에서는 배산이 북향이 아니라 남동향에 위치하여 주산을 설정하는데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그동안 전주의 주산을 두고 건지산설, 기린봉설 등이 설왕설래하였는데, 자연지리적 구도를 놓고 본다면, 전주의 주산은 승암산(僧岩山)이어야 한다. 고지도에 승암산은 성황봉(城隍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성황봉의 지맥이 발산으로 내려오고 발산(鉢山) 아래에서 터를 잡고 사람이 살면서 천년전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발산을 속칭 발리산(發李山)이라고 부르는데, 전주이씨가 처음으로 둥지를 틀었음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발산 아래에 전주이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살았음은 이목대(李穆臺)라는 지명이 말해준다. 이목대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기념비와 비각이 있다. 목조대왕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를 말한다. 고려말 이안사가 살았던 마을은 옥류동(玉流洞)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던 월당 최담의 비에 그가 태어난 곳을 옥류동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담은 고려말에 한벽루를 짓고 사부학당을 세우 후학을 양성한 전주최씨 집안의 인물이다. 지금도 두 비각은 옛 지명인 옥류동에 있다. 옥류동은 고려시대 전주사람들이 취락을 형성한 곳으로 보이나, 그 역사는 후백제시대인 고려초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후백제의 왕도유적인 승암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아래 마을이 옥류동이었던 것이다. 당시 승암산에는 왕성과 그 부속건물들이 있었는데, 그 왕성의 명칭이 전주성(全州城)이었다. 전주성 명문의 수막새와 암막새가 후백제 왕성 유적에서 출토되어 그러한 사실이 입증되었다. 후백제 당시 왕성유적이 승암산 산기슭에 자리잡은 것은 오로지 전략적 요충지가 고려된 것이며, 그 아래에 왕도 통치세력의 생활기반이 조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후백제시대 왕도세력의 생활기반은 옥류동 중심의 교동 풍남동 일대 한옥마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후백제 왕도의 도시구조는 고지도에 나타나는 격자형 도로망과 도시구도를 통해서 이해 할 수 있다. 격자형(格子形) 도로망은 경주, 남원 등 고대도시의 구획구도로서 전주 고지도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그 중심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다. 옥류동의 지명이 조선시대에 자만동으로 바뀌고 다시 교동으로 바뀌었지만, 오늘날도 후벡제 도시체계의 자취는 그대로 남아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후백제시대 왕도의 중심이 성황산과 그 산아래 교동과 풍남동 중심이었으며, 그 앞으로 전주천이 흐르는 형태의 도시구도였다고 본다.
「완산지(完山誌)」에 고려시대 전주의 도시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나타난다. 내용인 즉 "전주의 중심이 동쪽에 위치하여 서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언제 남향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다. 후백제 당시까지 전주의 중심은 동쪽에 위치하여 서향하는 구도(坐東西向)였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주성 아래 산자락에 마을이 조성되었는데, 고려중기 전주목의 치소가 설치되고 전주의 도시가 팽창하면서 행정의 중심이 산지에서 평지로 내려왔다는 뜻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고려 성종이 전국에 12목을 두면서 후백제의 왕도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방도시의 구도를 갖추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 교동시대에서 중앙동시대를 열다.
한마디로 후백제의 산지도성(山地都城) 구도가 고려중기를 기점으로 평지부성(平地府城)으로 전환된 것이다. 목사가 부임하여 근무할 새로운 부성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비로소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에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두고 지방관을 파견하고 있다. 전주에 관아부성이 평지성으로 처음 조성된 곳이 현재 풍남동·중앙동 일대이다. 중앙동에 관아건물이 처음 조성된 것은 후백제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발굴 결과 확인되었으나, 그 규모는 미지수다. 조선시대 전주부성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388년 안찰사 최유경이 평지에 전주부성을 조성하면서 본격화된다. 마침내 500여년의 남향의 부성이 축조된 것이다.
전주부성은 전라도 관찰사가 집무하는 전라감영과 전주 부윤이 집무하는 관아와 객사가 위치하는 평지부성이었다. 평지부성은 T자형 도로망을 근간으로 관아의 건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관아읍성이다. 전주부성의 서문과 동문을 수평선으로 도로를 내고 그 위쪽으로는 객사를 두었으며, 그 수평도로의 가운데에서 풍남문까지 도로를 개설하는 방식으로 부성의 기본 구도를 갖추었다. 풍남문에서 객사를 바라보면서 좌측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집무하는 관아건물이 들어서고, 우측에는 전주부윤이 집무하는 관아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T자형 도로망은 조선시대 중앙집권적 통치방식에 맞는 관아부성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객사가 왕권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역의 공간으로 궐전이 위치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 아래에 전라도 관찰사가 집무하는 전라감영과 전주부영을 두었다는 위계적인 관아건물의 배치를 통해서 알 수 있겠다.
T자형 도로망을 갖춘 도시구조에서 중심과 정점은 객사가 된다. 전주 객사는 남향을 하고 있으나 배산이 취약한 관계로 인공적으로 조산(造山)을 조성하였으며, 전조후시(前朝後市)라는 구획방식에 따라 풍남문 밖에 남부시장을 조성하였고, 좌묘우사(左廟右祠)의 구획방식으로 따라 경기전과 향교를 좌측에 두고, 사직단을 우측에 배치한 것이다. 조선시대 전주의 가장 번화한 거리는 객사에서 풍남문까지의 중앙동이었으며, 풍남문 밖 시장은 소비와 유통으로 사람의 왕래가 가장 빈번한 전주부성의 일번지였다. 이러한 조선시대 전통의 중앙동시대, 즉 전주부성의 번화가는 객사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송화섭(전주대 교수)
※ 이번 답사는 '전주의 옛 도시 구조'(안내 송화섭 전주대 교수) 12일 오후 2시 전주역사박물관 출발
한벽루→풍남문→전라감영터→전주객사→진북사→덕진연못
※ 다음 답사는 26일 '동학농민혁명의 길을 따라'(안내 이병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심사담당관)
※ 답사신청은 전주문화사랑회(www.okjeonj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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