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걸음질 치는 역사가 버거웠는지 무더운 여름날을 넘기지 못하고 또 한 분의 전임 대통령이 세상을 떴다. 지금 성급하게 그 공과(功過) 논의에 끼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몇몇 아쉽고 여전히 비판할 수밖에 없는 장면도 머리를 스치고, 미소와 감격으로 회상할 수 있는 장면도 영화처럼 지나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어느 정도 시대의 전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시대의 두께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한 가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그러나 그 추모는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과 함께 진행된 며칠간의 애도기간 중에 내내 떠나지 않았던 기억과 느낌은 베트남과 호치민에 대한 것이었다.
▲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
베트남. 중국 명(明)나라 태조가 남긴 유훈(遺訓)이 있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에서 정종으로 넘어가던 무렵의 일이다. 명 태조의 유훈이란, 주변에 정복할 수 없는 16나라가 있으니 절대 침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안남)은 그 16나라 중에서 두 번째로 꼽혔다. 그러면 첫 번째는 고려(조선)였다.
사대외교를 천명했던 조선이 명나라의 경계대상 1호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가진 역사에 대한 관념에 뭔가 수정을 요구한다. 사대외교에 담긴 팽팽한 긴장은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지만, 제국의 의심과 경계는 좀 지나치다싶다. 하지만 제국은 괴로웠다. 사방에서 뻔질나게 침탈했으므로. 이런 점에서 19~20세기에 벌어진 자본주의 팽창의 결과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침탈과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 형성된 사대관계는 매우 다른 조건에 놓여 있었고, 따라서 그 성격도 전혀 달랐다. 어쨌거나 명 태조의 유훈을 듣지 않고 성조(成祖·유명한 영락제)는 베트남을 쳐들어간다. 그러다가 인력과 비용만 낭비하고 저항에 부딪힌 명나라 군대는 철수해야했다.
자부심에 관한 한 조선에 밀리지 않았던 베트남도 근대 제국주의의 침탈에는 견디지 못했다. 응우옌(阮) 왕조 때인 1885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이로부터 긴 반식민주의 투쟁이 베트남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 20세기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호치민(1890~1969)이었다.
호치민의 아버지는 유학자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를 지내기도 했지만,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관직이 순탄하지 않았다. 호치민도 국학(國學)에 들어갔지만 프랑스 식민정권에 저항하다가 퇴학당했다. 그리고 그는 배에 요리사로 취직하여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에서의 독립운동으로 감시를 받게 되었을 때 호치민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겼다. 호치민은 프랑스 당국이 자신에게 '전속 부관'(경찰 감시원)을 제공한 것에 감사한다면서, '농업과 산업에 노동력이 부족한 이때, 전속 부관들은 게으름을 피우며 예산을 낭비하고 있으니' 자신에게 부관을 부쳐주는 호의를 사양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을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작업장
오후: 신문사 또는 도서관
저녁: 집 또는 교육적인 대화 자리에 참석
일요일과 휴일: 박물관이나 다른 흥미 있는 곳 방문
자, 되었는가!
물론 프랑스 식민지 장관인 알베르 사로(전 베트남 총독)이 이 편지를 받고 웃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호치민은 어느 곳에서건 이런 여유를 지녔다.
▲ 베트남을 믿기에 가졌던 희망
베트남을 여행했을 때, 호치민이 지었다는 한시(漢詩) 몇 편을 본 적이 있다. 한시에 조예가 없어서 평을 할 수는 없지만, 무척 단순하고 메시지가 명료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흔히 호치민은 유학자의 품성을 지녔다고 한다. 그 예로 검소하고 소탈한 성격을 꼽는 이들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호치민 기념관에 갔을 때, 그가 사용하던 작은 대나무침대와 책상, 몇 권의 책 등 그의 유품을 보면서 그의 인간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매우 유연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려운 지경에서도 유쾌한 농담을 잊지 않았다.
온몸이 울긋불긋 비단옷을 입은 듯
온종일 긁적이니 거문도를 타는 듯
비단옷에 갇혔으니 모두가 귀한 손님
거문고 타는 동료들 음악을 아는구나.
(滿身紅綠如穿錦 成日撈搔似鼓琴 穿錦囚中覩貴客 鼓琴難友盡知音)
호치민은 항불(抗佛) 독립운동의 연대를 위해 1942년 중국에 갔다가, 도리어 1년 동안 18개 감옥을 옮겨 다니며 국민당의 감옥살이를 겪었다. 참 황당했을 것이다. 위의 시는 그 당시 감옥에서 옴에 걸렸을 때 지었다.
이렇듯 오랜 반식민주의 투쟁에서 얻은 신뢰, 경직되지 않은 인품과 국민들의 아픔을 현장에서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변함없는 태도 때문에 베트남 국민들은 대통령 호치민을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 인간에서 신화로
그러던 그가 1969년 9월 2일, 아직 남북 베트남이 갈려 있던 와중에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그런데 역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소박한 마음으로 추모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인물로 인하여 취할 수 있는 뭔가의 있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조차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안을 가진 대개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생전에는 물론 죽은 뒤에도 자신을 신격화하는 어떠한 활동이나 조치에도 반대한다.
호치민은 자신이 죽은 뒤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호치민의 동지들은 그의 유언을 저버렸다. 호치민이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968년 소련의 전문가가 비밀리에 하노이에 와서 호지민의 시신을 방부(防腐) 처리하는 사안에 대해 조언하였다. 그리고 정치국은 '미래 세대를 교육하기 위해' 방부 처리한 호치민의 시신을 전시할 기념관 건설을 승인하였다. 인민복 차림으로 두 손을 모은 채 누워 있는 그 인물은 여유로운 농담과 허식 없는 품성의 호치민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지금도 그의 시신은 매년 방부 처리를 하러 러시아에 간다.
1980년 말이 되어서야 소박한 장례식을 원했던 호치민의 유언장이 부분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당(黨)에서 독립기념일인 9월 2일의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호치민의 사망을 9월 3일이라고 발표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레닌이 세상을 뜬 뒤 스탈린이 비슷한 짓을 했다. 결국 레닌의 동상은 본의 아니게 세워졌고, 후일 밧줄에 감기어 내동댕이쳐졌다. 레닌은 그나마 동상이지만, 호치민은 시신이다. 베트남 국민들의 지혜를 믿을 수밖에 없지만, 산 자들의 욕심으로 죽은 자를 제때 보내지 않아 욕을 보게 만드는 것, 그것은 자신들의 시대를 스스로 감당할 능력도 비전도 없다는 고백에 다름아니다. 보낼 분은 보내드리자. 그것은 예의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시대는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는 산 자들의 약속이자 자존심이기도 하다.
/오항녕(한국고전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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