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공존하는 상상력의 공간…고인돌에 '이름 붙여줘라'
2000년 6월 체코 프라하. 유네스코 문화위원회 소위원회는 한국의 고인돌을 심의한다. 결과는 부결. 발굴조사와 보존발전계획이 미비하다는 것이 그 이유. 그러나 다시 서류를 보강하고 외교전을 펼친 끝에 다섯 달 뒤 12월 2일, 강화 고창 화순 지역의 고인돌(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은 세계문화유산 등재(C-977)에 성공하게 된다. 이 문화유산 지정으로 고창 고인돌은 속된 말로 뜬다. 관광객의 증가는 물론 고용기회와 수입증대, 정부의 추가적인 관심과 지원에 이어 세계유산기금(World Heritage Fund)으로부터 기술적, 재정적 원조를 받을 수 있다. 지역 및 국가의 자부심 고취는 보너스다.
고창의 고인돌군은 동북아에서 고인돌이 가장 밀집된 중심지역으로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이라는 유네스코 등록기준에 합당해서 지정되었지만, 속앓이를 하는 동네가 있으니 바로 전남 장흥이다. 장흥 역시 화순 아래쪽 서남해안권에 위치한 고인돌의 보고(2264기 산재)이지만 유네스코 지정에서 빠진 것. 문화유산등재 신청시 고창군수와 공무원들은 이 '돌무더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애를 쓴 반면, 그 동네는 다른 일로 바빴을까? 이 문화마인드의 결과로 고창은 관광부가가치라는 무한한 혜택을 입고 또 다른 쪽은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 '온리 원(only one)'은 아닐지 몰라도 '넘버 원(number one)'임에 틀림없는 고창 고인돌에 대해 들여다보았다.
▲ 세계문화유산과 고창고인돌박물관
허준의 「동의보감」이 이참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보면 사실 고인돌군은 일반인의 가치인식보다도 문화유산 지정이 먼저 된 케이스다. 남북한 합쳐 약 3만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 바로 전라북도 고창이다. 고창 고인돌군에 오면 우선 그 사이즈에 혹하고 다음에는 그 숫자에 놀란다. 가마니만한 애기 고인돌에서 50톤에 이르는 탱크만한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공존하는 것이 그 특징.
돌덩어리 아닌 이 보물덩어리는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 일대에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하니 가히 선사박물관이라 이를 만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의 건축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화유적이다.
이 선사유적이 자리 잡은 위치를 보면 나즈막한 야산과 들과 강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한 눈에 봐도 이 지역이 곡창지역이자 어로채집 등 물산이 풍부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주위 산들이 버티고 있어 혹독한 겨울을 나는데 땔감도 풍부할 터이니 살기 좋은 동네였을 것.
유적지 앞에는 전국 유일의 고인돌박물관인 '고창고인돌박물관'이 2008년 9월 5일 문을 연 이래 현재까지 약 2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한다. 향후 연간 60만명의 관광객 유치가 목표인데 새만금이 완공되면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박물관 2층에는 고창 매산마을에서 출토된 청동기 시대의 마을을 섬세하고 흥미롭게 재현해 놓았다. 모두 고고학, 문화인류학에서부터 의상과 식생활까지 고증을 거친 것. 3층 체험관은 어린 학생들을 위해 불 피우는 방법부터 고인돌의 형태와 구조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학습공간을 조성해 놓았다.
유적지와 박물관을 잇는 전기자동차로 만든 탐방열차가 운행되고 있고 고인돌마다 철책보호대와 탐방로 정비, 포켓쉼터, 습지복원 등에 힘을 써 최대한 자연을 가깝게 느끼며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청동기인의 삶터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다섯 동의 체험움집과 2곳의 망루 등은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전국 최대의 선사마을 조성을 목표로 한다고.
▲ 브랜드의 스토리텔링화
고인돌 제작은 단순히 집권층의 대중동원능력을 보여주는 상징물만이 아니라 균형과 조화감각이 필요한 고난도 작업이다. 큰 돌과 작은 돌을 적절히 사용해 고창읍성 성곽을 만든 기술 그리고 전라북도의 미륵사지석탑과 왕궁탑의 조성의 힘과 미학은 어디서 왔을까? 고창 고인돌을 만든 선사인들의 기술이 DNA 속에서 전수돼 왔을 것이다. 한국 최고의 화강암을 주무르는 익산 황등 석공들의 피 속에는 도산리 지동 고인돌을 만든 석수장이의 맥이 흐르고 있을 터. 그러나 사회학 책을 읽은 청년은 계급사회의 시작인만큼 하층민들의 눈물과 땀의 결정체로 이 명품 묘지를 사치재로 읽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러면 뭐냐? 스토리텔링이다.
'헌화가'의 매력노인이나 수로왕비 모두 스토리텔링이 살찌운 것. 우리가 해야 할 숙제는 저 고인돌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풍천장어에 복분자를 먹은 사람이 힘을 써서 이 고인돌들을 날랐다'는 이야기는 과연 역사의 왜곡일까? 고인돌유적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는 이제 충분히 알려져 있고 박물관은 어린 학생들의 학습장으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가수와 화가 같은 문화인들이 나서야 할 때다. 어떻게? 고인돌에 감성을 불어넣는 것.
힘의 상징인 장어와 요강을 엎는다는 스토리텔링을 가진 복분자는 사실 고창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이웃 정읍과 순창의 복분자도 질이 떨어지지 않지만 외지 사람들은 복분자 하면 고창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선점한 자의 이미지메이킹이 중요한 것. 광고도 그렇지만 복분자와 장어의 앙상블이 시너지 효과를 준 것이리라.
무게가 50톤이 넘는 이 국가대표급 고인돌들을 보고 공책에 부지런히 뭔가를 쓰는 어린 아이는 탱크 같다고 하고 또 어른들은 고래 같다고 한다. 그러니 이 돌군락은 메타포를 뛰어넘는 무한상상력의 공간이다. 달랑 번호만 붙어있는 이 고인돌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 필요할 시점이다. 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그 결과를 서로 공유하는 공간인 것. 문제는 다시 스토리텔링이다. 송창식이 부른 '선운사'같은 노래를 지어 부를 가수는 없을까? '겨울연가'같은 드라마의 촬영공간으로 소개된다면 그 파급효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고인돌과 선운사를 비롯한 유형의 자원과 신재효 선생의 판소리 같은 무형의 자원, 새로운 자원을 만들어가는 학원농장의 청보리밭 등이 지면과 매체를 장식하고 있지만 문제는 있다. 2007년 고창 장성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고창 지역민들이 전주권이 아닌 광주권으로 쇼핑과 레저를 즐기는 경향이 늘어난 것. 문화유산을 찾는 관광객은 증대하고 있지만 실제 주민들의 인구유출이나 지역경제의 선순환을 위해서는 전라북도 단위의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 고인돌 콘텐츠 활용 방안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을 문화판에서 자주 사용하는데, 고창은 워낙 빵빵한 브랜드들이 자리를 잡아서 승자에게 밀어주기라는 비아냥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고인돌과 선운사 그리고 장어와 복분자 등이 자연스럽게 선택되고 집중된 케이스다. 거기다 청보리밭(봄)과 메밀밭(가을)으로 뜬 학원농장은 <웰컴투 동막골> 을 비롯한 숱한 영화의 배경이 아닌가? 선운사 붉은 동백이 통으로 눕고 난 4월 청보리밭 초록바다에도 고인돌이고 배추싹과 선연한 황토자욱이 대비되는 9월 메밀밭 가는 길에도 고인돌이니, 대산면 상금리 고인돌군을 그냥 스치는 사람은 바보다. 웰컴투>
고인돌 콘텐츠 활용방안으로 2009 문화체육관광부 주최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에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길'이 선정돼 1억원의 지원금을 받아 고창의 역사문화체험길로 조성된다고. 이 탐방코스는 '구불구불 강 따라 풍천장어길', '요강을 뒤집는 복분자길'을 비롯 미당문학관으로 이어지는 '국화길'과 '소금길'등 걷기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고인돌마라톤대회도 있지만 제주 올레길에 못지않은 걷기코스가 기대된다.
고창 밖에서 시도되는 콘텐츠도 있다. 출판사 김영사에서는 '신나는 교과학습체험'시리즈로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이라는 책을 펴냈다. 박물관을 다녀오기 전과 다녀온 후의 학습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책으로 초등학교 4~6학년의 사회 교과 정보와 연계하여 견학 할 수 있도록 잘 소개되어있다. 이밖에 「이색마을 이색기행」, 「기분 좋은 1박2일」 등 여행정보 책들에도 고창 고인돌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전남 화순고인돌 유적지에서는 '고인돌 사람들의 마음알기' 라는 주제로 지난 8월 선사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고, 포항에서도 '고인돌 탐방프로그램'을 통해 가족들이 동해바닷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면서 동해안 지역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이 행해지고 있다. 앞으로 고창에서도 즐거운 학습과 편안한 휴식이 되는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이 나오길 기대한다.
/신귀백 문화전문객원기자(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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