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보여지는 서양화가 이창규씨(원광대 교수)의 화두는 '전통성 회복'이다.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쫓되 형식이나 수법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롭게 재해석된 그만의 방식은 추상화된 문양과 오방색(五方色)의 접목.
5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열고 있는 이창규 개인전은 정년 퇴임을 앞둔 그의 화단 40여년을 정리하는 자리다.
줄곧 그림이 좋아서 내달려온 시간.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아우러진 작품 5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70년대는 묘사 중심이었어요. 자연이건 사물이건 무조건 열심히, 닮게 그리는데 충실했죠. 80년대엔 색채나 형태의 재현에서 저만의 개성이 드러난 것 같습니다. 파란색 계열이 쓰여지기 시작했구요."
재수를 거듭해 우여곡절 끝에 원광대 미술교육과에 진학하면서 1막을 열었다.
2막의 시작은 1980년. 강의를 해오면서, 이론과 실기의 균형을 위한 고집이 작업에도 반영됐다. 미술해부학 강의로 누드 습작을 했고, 서해안 바다 풍광을 주제로 한 논문을 쓰면서 바다도 실컷 그렸다.
"(저는) 사진 놓고는 안 그립니다. 기계가 고정시켜 놓은 이미지를 보고 무슨 감동이 올 수 있겠어요. 1년간 서해안 일대를 훑고 다녔습니다. 참 행복했죠."
'생로병사'(1990)엔 백마를 타고 날고픈 청운(靑雲)의 꿈을 지닌 청년기, 모래시계를 통해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듯한 중·장년기 불안한 영혼의 그가 담겼다. 하지만 이 작품은 미완성. 시기를 놓쳐 방치됐던 것을 제자들의 부추김으로 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
90년 반추상 작업과 함께 3막을 맞이했다. 1990년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면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생겼다고 했다. 불교미술을 이해할 때에만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겨 2년간 화엄불교대학에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궁과 사찰의 기둥머리 장식을 추상화한 문양이 한국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을 드러내는 '무엇'이라고 여기고 있다.
1996년 그는 구이면 백여리에 절간 같은 작업실을 마련했다. '텅빈 충만'(1997), '나는 누구인가'(2001),'깨달음'(2005) 등 일련의 작품은 끝모를 구도자의 길을 걷는 또다른 그가 반영됐다.
학교를 떠나게 될 무렵 그는 또 한차례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다. 비워내고 비워낼수록 더 가득해지는 '텅빈 충만'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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