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11 23:56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문화마주보기
일반기사

[문화마주보기] 길을 걷는 이유 - 전성환

전성환(전북도 홍보기획과장)

나는 자동차가 없다. 거창하게 환경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다보니 굳이 차를 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나의 하루는 천변을 걸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출근길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길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동차 운전대를 잡는 사람과, 강물결과 바람결을 느끼며 시작하는 사람의 하루는 결코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걷는다는 아주 단순한 행동 속에는 취미를 넘어 치유의 기능까지도 들어있다. 고깃비늘처럼 윤나던 갈대꽃이 어느 순간 깃털처럼 활짝 펴서 바람에 흩날린다. 철철이 피어나는 꽃과 풀을 보는 재미, 물이 줄거나 불어나는 것을 보는 재미, 바람결에 실려 오는 계절의 냄새를 맡는 재미…… 이런 재미를 어찌 자동차 운전하는 것에 비길 수 있으랴. 자동차로 갈라치면 10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시나브로 걷다 보면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이 아침시간 때문에 나의 하루에 윤기가 생긴다. 하여 나는 자연스럽게 '걷기 예찬론자'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요즘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전라북도 곳곳에 '걷는 길'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지난 10월 17일에는 변산 마실길이 개통됐다. 이미 오래 전부터 '걷기'에 선견지명이 있었던 신정일 선생을 필두로 '우리땅걷기모임' 회원들이 제안하고 다듬어놓은 길이다. 바다를 따라 걷는 변산 마실길은 제주도 올레길 못지않은 빼어난 길이라고 한다. 아직 걸어보진 못했지만 벌써부터 걷고 싶어 다리가 근질거린다.

 

지난 31일에는 전라북도 4대 종교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순례길'이 열렸다. 순례길은 전주, 완주, 익산 지역에 있는 4대 종교의 성지를 연결하는 길이다. 종교순례길이라고 해서 딱딱하고 위엄을 요구하는 길이 아니다. 중간 중간에 가람 이병기 생가, 강암 송성용 기념관, 만경강 갈대밭, 송광사 돌담길, 고산천 오솔길 등이 포함돼 있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길이다. 4대 종교를 아우를 수 있는 곳은 전라북도가 유일하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잘 살린다면 산티아고 순례길 부럽지 않은 독보적인 순례길이 만들어질 것이다.

 

전라북도는 산업화에 뒤처져있던 탓에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름다운 길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군산에는 '구불길'이 있고, 진안에는 '마실길'이 있고, 고창에는 '질마재길'이 있다. 전라북도는 이 모든 길을 이어서 '예향천리 둘레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전라북도만이 아니다. 지금 세계는 걷기 열풍이 불고 있다. 자동화의 편리함, 유비쿼터스의 첨단기술을 선망하던 사람들이 이제 비로소 걷기의 소중함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순간의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직접 길을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 길은 결코 자신의 길이 되지 않는다. '길 위의 풍경'의 저자 김병용의 말처럼 "몸을 부리는 것만큼 자신의 상태 앞에 정직한 일도 없다. 마음이 먼저 달려갈 수도 있지만, 몸이 가지 않는 길은 존재하더라도 아직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단풍이 지고 바람이 한결 차가워졌다. 길을 떠나기 좋은 때이다. 길 떠나는 이에게는 세 가지 길잡이가 있다고 한다. 풍문, 충동, 길 그 자체.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기 위해 길을 떠나는 이도 있고, 문득 떠나고 싶은 아름다운 충동에 못 이겨 길을 떠나는 이도 있고, 그저 길이 좋아서 탐구하듯 길을 떠나는 이도 있다. 이 가을, 당신은 무엇 때문에 길을 떠나겠는가?

 

/전성환(전북도 홍보기획과장)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