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모시고 손님 대접…집집마다 빚던 '귀한 음식'
우리 민족은 상고시대 때부터 음주가무를 즐겼고, 풍부한 물산과 좋은 물을 이용하여 다양하고 질 높은 술을 빚어왔다. 우리 술문화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술을 음식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아직도 술을 마신다는 표현보다 '먹는다'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둘째,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는 점이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을 중시하는 유교문화는 술을 김치처럼 집집마다 빚어서 손님에게 대접하고 제수용으로 썼던 가양주 문화를 자리하게 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술문화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큰 시련을 겪기 시작한다. 1907년 일제가 만든 주세법은 식민지 수탈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와 함께 조선의 가양주 전통을 말살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근대적 자본을 바탕으로 한 소수의 허가받은 사업자만 술을 판매토록 하여, 우리의 가양주를 밀주로 전락시키고 가양주 전통을 순식간에 말살시켰다. 이 과정에 우리의 입맛, 즉 술맛은 대량생산되는 희석식 소주와 맥주 등에 길들여졌다. 1988년 올림픽을 치르면서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내놓을 우리 술이 없다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국가차원에서 전통주를 지정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안타깝고 부끄러운 역사다.
현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술은 전주 이강주(조정형), 정읍 죽력고(송명섭), 김제 송순주(김복순) 등 세 가지다.
이강주(梨薑酒)는 조선 중엽부터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제조된 술인데, 전통방식으로 내린 소주에 배, 생강, 울금, 계피, 꿀 등을 넣어 장기간 숙성시켜 만든다. 이강주는 「동국세시기」 「경도잡지」 등 각종 문헌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조선 중기부터 양반계층에서 즐겨 마시던 명주이다.
죽력고(竹瀝膏)는 청죽(靑竹)을 구워 나오는 진액에 여러 약재를 섞어 전통소주와 함께 중탕해서 만드는 끈끈한 술이다. 한방의학에서 고(膏)는 오래 달여서 찐득찐득해진 상태를 말하지만 전통주에서는 여러 번 술덧을 한 고급술을 일컫는다. 이와 비슷한 술 명칭으로 춘(春)이 있는데, 춘이란 말은 보통 3번 이상 술덧을 한 명주에 붙인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평양 감홍로(甘紅露), 전주 이강고(梨薑膏)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꼽았다. 「임원십육지」에서는 몸에 마비가 올 때 약용으로 썼다고 전한다.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에 부상당한 녹두장군 전봉준이 죽력고를 찾았다는 일화가 남아있어서 이 사실을 방증한다.
송순주(松荀酒)는 소나무순(松荀)을 이용해 만들어 소나무 향이 은은한 청주를 통틀어 말하는데, 김제 송순주는 조선 선조 때 문인 김탁의 가문에 전해오던 가양주이다. 김탁의 부인이 위장병과 신경통을 앓고 있었는데, 김탁이 어느 여승에게 배운 송순주를 빚어 먹이자 차츰 낫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렇듯 문화재로 지정받은 술 이외도 전북에는 많은 전통주가 있다. 완주 모악산의 수왕사에는 송죽오곡주와 송화백일주가 전해오고 있다. 송화백일주는 송화가루를 이용해 진묵대사가 개발했다고 한다. 송죽오곡주는 진묵대사의 기일에 바치던 제수용 술인데, 모악산 주위에서 서식하는 각종 약초와 석간수를 이용해서 만든다. 이래저래 진묵대사와 관련된 설화가 살아 숨 쉬는 술이다. 김제 학성강당(學聖講堂)은 경주김씨 가문이 조선시대 때부터 운영해 오던 개인서당인데. 이곳을 방문하면 이름도 고운 백화주(百花酒)를 맛볼 수 있다. 경주김씨 가문은 「경주김씨세보」에 "매년 섣달에 백화주, 백초주, 백초화주 중 한 가지를 빚어 제사와 손님 받들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남겨놓을 만큼 특히 술을 중하게 여겼다. 백화주는 이름처럼 백 가지 꽃이 들어가는 술이다. 3번 덧술해서 빚은 청주에 100여 가지 들꽃과 약초를 담아 우려낸다. 익산 호산춘(壺山春)은 가람 이병기 시인이 즐겨 마셨다던 연안이씨 집안의 가양주이다. 여산면에서 생산되었는데, 여산(礪山)의 옛지명이 호산이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한다. 최근에 (주)화곡주가에서 복원해 상품화했다.
인류와 함께 한 가장 오래된 기호식품 중 하나가 술이다. 술은 단순한 상품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보드카가 생산되는 곳은 많지만 보드카 하면 연상되는 나라는 러시아이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는 서로 위스키의 종주국임을 주장하며 위스키의 철자를 구분하여 사용하는데, 스카치위스키는 'whisky', 아이리쉬위스키는 'whiskey'라고 표기한다. 프랑스는 와인으로 문화적 자부심뿐 아니라 엄청난 경제적 이익도 챙겼다. 물에 석회질이 많아서 대체음용식품으로 발달한 독일의 맥주는 이미 전 세계의 대표적 술로 자리 잡았다. 백제의 양조기술을 이어받은 일본만 하더라도 각 자치단체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전통 청주, 사케가 상품화되어 있다. 이에 비해 상품화된 한국의 전통청주는 전국을 합해도 100여 가지에 못 미친다. 전북의 경우도 상품화된 전통주는 문화재로 지정받은 술을 비롯하여 송죽오곡주, 송화백일주, 호산춘 등 몇 개에 불과하다.
전통주 활성화를 막는 큰 이유는 일본제국주의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긴 주세법이라는 것에 대부분 전통주 연구가들은 동의한다. 전통주를 지켜야 될 문화유산으로 보지 않고 단순한 과세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이다. 최근에 주세법이 일부 개정되어 전통주 활성화의 계기가 되고는 있지만 기본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 큰 문제는 전통주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전문기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전주전통술박물관 이지현 교육팀장은 "가양주 문화를 보급하기 위해서 우리도 많은 프로그램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매번 느끼는 어려움이 전문강사진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늘고 술을 빚는 사람들이 늘어서 현장의 요구가 많다. 술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 술 상품화 지원, 안주 개발, 술애호가 양성을 위한 전문프로그램 개발, 술병 디자인 개발 등이다. 그렇지만 이런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이나 학과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최근에 대학에서는 양조학과를 설립하고 민간단체에서는 자격증 제도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한다. 더불어 계속 사라져가고 있는 가양주를 발굴하여 보존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책적 지원도 없이 전통주가, 술의 보통명사처럼 불리는 코냑처럼 세계적 술이 되길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한 기대이다.
/이경진(시인)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