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진 인정' 넘치는 맛의 세계…술 앞의 평등 세상
'엄벙한 것'의 대명사였던 막걸리가 뉴스다. 누보 막걸리와 햅쌀 막걸리에 이어 일본인들이 맛코리(マッコリ)란 이름으로 막걸리를 즐긴다고 한다. 아셈(ASEM) 건배주로 사용한 것이 벌써 옛날이니 당연히 대형주류업체에서 뛰어들고 호텔에서도 막걸리를 판다. 옛 주신(酒神), 막걸리의 귀환이다.
포털 창업란에서는 전주식 가맥점과 막걸리집을 모집 중이다. 좀 된다 하는 집들은 상표 출원과 브랜드화 내지는 프랜차이즈화를 고심하고 있단다. 개인 블로그와 카페도 전주의 막걸리집과 가맥 투어가 단골 안주가 된 지 오래다. 거의 성지순례 수준이다. 문화란 동시대 동지역 사람들이 자연스레 누리는 것, 한 시대를 초월해 오래도록 유지되고 그것이 다른 지역으로 전해지는 것 아닐까. 그래서 전주의 독특한 술 문화 두 가지 막걸리와 가맥 문화를 들여다보았다.
▲ 술 평등, 전주막걸리 문화
'신이 물을 만들었다면 인간은 술을 만들었다.' 빅토르 위고 선생 말씀이시다. 사람 사는 곳에 반드시 술이 있고 지역마다 특징적인 술이 있다. 장소를 말하지 않아도 와인, 보드카, 마오타이가 저 먼 나라의 술이라면 우리나라는 소주와 막걸리고 전주는 역시 막걸리다.
전주의 막걸리집은 경원동 동부시장 골목을 필두로 신도심으로 자리잡은 삼천동과 서신동 그리고 평화동 사거리 뱅뱅 뒷골목을 비롯해 아중지구 등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 옛날 <완산집> 과 <정읍집> 에서 시작돼 전북대 앞 <샘터식당> , <농부집> 이 사라지고 난 후 <홍도주막> , <전주막걸리집> , <경원집> 등 새로운 강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사랑채> , <내고향> 등 소박한 이름부터 <배꼽> , <각설이> , <두여인> , <어우동> , <바이전주집> 등 이름도 진화한다. 이 막걸리집들이 한 집 평균 100여 통을 팔면, 전주에서 하루 소비되는 양은 750mL들이 만 여 통이 넘는다. 장강이다. 바이전주집> 어우동> 두여인> 각설이> 배꼽> 내고향> 사랑채> 경원집> 전주막걸리집> 홍도주막> 농부집> 샘터식당> 정읍집> 완산집>
전주 막걸리집은 술값만 받는다고 블로그마다 입소문이 났다. 막걸리 3통들이 한 주전자에 1만2000원이 공시가격이다. 안주는 공짜. 공짜인데, 메뉴판은 무슨. 메뉴는 주인 맘이시다. 기본 안주는 보통 스무 가지가 넘어 상다리가 휘어지지는 않지만, 담배나 라이터 놓을 자리도 없다. 막걸리 한 주전자씩 추가할 때마다 특별안주가 나온다. 편육, 족발 정도로 명함 내밀기는 그렇고 백숙, 옻닭, 삼합, 광어회, 꽃게장, 크진 않아도 활전복도 나온다. '왜 우린 저건 안 주냐?'고 물으면 서울 촌놈이다. 술을 많이 시키면 안주가 나오는 것은 게임을 통해 아이템을 얻는 방식이고 마일리지와 같은 개념이다. 이 마일리지는 단 그날 하루만 해당된다. 그러니 평등세상이다. 교회나 절보다 더 평등한 곳이 전주의 가맥이고 막걸리 집이다. 방이 따로 없는데 누구에게 더 좋은 안주를 준다든지, 고위 공무원이 왔다고 3차 안주가 처음부터 나오는 법은 없다. 술 앞의 평등이다.
전주 술꾼들은 막걸리를 상류층(가라앉지 않는 맑은 술)과 하류층(가라앉아 떫은 술)으로 구분해 마신다. 요즘 선수들은 상류층을 좋아한다. 수많은 소주파와 맥주파를 막걸리파로 전향시킨 소설가 이병천씨 같은 주당들은 좀 떫다 하면 며칠 된 것으로 바꿔 달라고 한다. 막걸리에 예민한 이런 선수들을 주모는 더 사랑한다. 서울 손님은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전주의 주모들은 적은 양으로 주전자를 채우는 스킬을 부리지 않는다. 선수들은 한 손에 탁 들면 '척' 하고 나오는 양을 저절로 알기 때문에.
전주의 막걸리집엔 진귀한 풍경도 연출된다. 단돈 만 원대에 저녁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어서다. 막걸리집에서 계를 하는 알뜰 아줌마부터 와인에 치즈 혹은 양주 (폭탄주) 만을 즐길 것 같은 벤츠 타고 오신 장년층까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른다. 맛과 멋에 취하고, 안주와 착한 가격에 취한다는 전주 막걸리. 한자리에 앉지 않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먹거나 노래를 좀 부른다 싶으면 귀기울여주는 풍경 역시 흉이 아니다.
그렇다고 서울서 오신 분들, '푸진 인정' 극찬만 마시라. 이 착하다 못해 불쌍한 가격이 착취적인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보시라.
경기도 고양시가 대한민국 막걸리 축제를 개최한다. 벌써 7회를 넘겼다. 그렇다고 배 아플 필요가 없다. 정구지찜을 메인 안주로 하는 무슨무슨 체인점 막걸리가 전주엔 쉽게 발 붙이지 못할 테니까. 다만 전주시와 작가들은 따로 할 일이 있다. 바로 막걸리 스토리텔링이다. 전주서 안하면 어디서 한단 말인가?
▲ 술 평등 그 둘, 가맥 문화
독재와 쿠데타 시대를 반복하며 살아온 전주의 주당들은 착한 백성답게 막걸리가 끝나면 가맥으로 향한다.
가맥이 '스트리트 비어'인지 아니면 '가게 맥주', '가정용 맥주'의 준말인지는 아직 학설이 분분하다. 가게마다 '휴게실'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데 슈퍼 같기도 하고 음식점 같기도 하다. 음악이나 인테리어 그런 것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 양복쟁이부터 '끈 나시' 입은 처녀들까지 술 마시기에 진지한 모습이다. 소음이 편안함이 되는 공간, 넘침 앞에 죄스럽지 않은 평등한 공간이다.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바지 슬리퍼 청년이라고 병에 입을 대고 마시지 않는다. 언더락 잔으로 마시지도 않는다. 맥주 한 병 2000원으로 기본 세 병. 알아서 손님들이 가져다 먹는다. 싸구려 탁자, 교실 같은 분위기에는 손님이나 주인 모두 '헛째'가 없다. 주차장 없이도 가게문을 여는 배짱이 통하는 동네다. 왜? 맛있으니까, 멋있으니까.
스테인레스 쟁반에 넓적하게 몸을 벌린 황태가 나온다. 동해에서 명태로 잡혀와 강원도 덕장을 거쳐 황태로 변신한 이 안주감은 이곳 전주 슈퍼에 와서 연탄불 위에 오르면 삼 실꾸리처럼 잘 퍼져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장맛과 황금의 조화를 이루어 낸다. 윷놀이 깍쟁이에 쓰면 딱 좋을 작은 종지에 든 작게 썬 알싸한 청양고추와 참깨가 들어간 그 달착지근한 소스장이 가맥의 역사를 새로 썼다. 홍상수 감독이 전주서 만든 영화 디지털 3인삼색 <어떤 방문>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이선균이 '가맥집의 황태를 잊을 수 없다.'고 한 말은 아마 중독성 짙은 장맛에 대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이런 맛을 본 전주 주당들은 골뱅이에 누기 어린 땅콩하나 놓고 마시는 호프집 가서도 장맛이 있네 없네 잔소리를 한다. 술집 하기 어려운 곳이 전주다. 어떤>
저 옛날 정미소에서나 쓸 성 싶은 벨트 달린 망치로 갑오징어 두들겨 패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면, 술꾼이 아니다. 고추와 당근이 잘 다져진 노릇노릇하고 단단한 계란말이와 딱딱하고 두툼한 갑오징어가 부드럽게 씹히는 맛을 안 본 사람은 전주를 봤다고 말을 하지 마시라. 전북대 사회교육원 사거리의 <전일슈퍼> 의 풍경을 두고 최명희 문학관 최기우 실장(극작가)은 '한반도의 가맥'이라고 했다. 말 된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서신동에 이 슈퍼의 분점이 생겼다. 장맛을 공개했다는 말이렷다. 술안주가 디카 사진의 훌륭한 재료가 되고 좁은 여자화장실마저도 귀여운 뉴스가 되는 이 슈퍼는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그런데, 나이트클럽 못지않게 맥주회사의 물관리가 필요한 이곳이 요즘 영업정지 중이다. 전일슈퍼>
전주 술꾼들은 이쪽에서 먹으면서 기업형 가맥인 저쪽을 탐하지 않는다. 기회비용에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만 서울 순례자를 위해 몇 군데 정보를 제공한다. <영동슈퍼> 는 튀김닭발이 기본안주고, 교실 수준의 <임실슈퍼> 특별 레시피는 수제비 띄운 명태대가리국이다. 집집마다 피나는 노력으로 안주를 개발 중인 것. 참치가 들어있는 부침개, 투가리에 홍합 든 미역국, 갓 담은 겉절이가 두부와 함께 나오는 전주의 가맥집들을 별 세듯이 세어 보자면, <그린슈퍼> <소망슈퍼> <신신슈퍼> <문화슈퍼> <슬기슈퍼> <은하슈퍼> <초원슈퍼> <로얄슈퍼> <도일슈퍼> 등등. 세다 지친다. 도일슈퍼> 로얄슈퍼> 초원슈퍼> 은하슈퍼> 슬기슈퍼> 문화슈퍼> 신신슈퍼> 소망슈퍼> 그린슈퍼> 임실슈퍼> 영동슈퍼>
이 평등한 가맥 집 중 불평등하게 한 집을 소개 하자면, 한옥마을 안에 자리한 <딱좋아 휴게실> 이다. 윤진서가 주연한 영화 <울어도 좋습니까?> 에서도 나온 집인데, 주인 아줌마의 노래 '동백아가씨'는 절창이다. 맥주 한 박스도 안 시키고 노래 불러 달라면 그건 술꾼의 매너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인다. 울어도> 딱좋아>
전주에서 술마시기를 엿보던 '엄벙한' 전주 밖 술꾼들이 가끔 모험을 저지른다. 자기 사는 곳에 전주식 가맥집을 여는 것. 일단 적은 자본으로 시설비 많이 들지 않으니 쉽게 뛰어든다. 그러나 쉽게 실패한다. 왜? 장맛은 나름 창조할 수 있겠지만 그 동네 사람들이 술을 즐기는 마인드, 술 앞의 평등한 문화는 쉽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신귀백 문화전문객원기자(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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